보졸레 누보를 생산하는 프랑스 보졸레 지역의 포도밭 너머로 마을이 보인다.
보졸레 누보를 생산하는 프랑스 보졸레 지역의 포도밭 너머로 마을이 보인다.

해마다 11월 셋째 목요일이면 전 세계에 프랑스산 ‘햇와인(수확한 해에 바로 마실 수 있는 와인)’이 풀린다. 바로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다. 지금 바로 근처 와인숍이나 마트에 가면 올해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 가운데 가장 먼저 출시된 2020년산 보졸레 누보가 당신을 반길 것이다. 보졸레 누보는 한때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다 저급한 와인이라는 오명을 쓰고 단숨에 이미지가 추락했다. 하지만 최근 그 진가가 재조명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보졸레 지방에서 생산되는 와인 중에는 누보 외에도 다양한 고품질 레드 와인이 있다. 영욕의 세월을 이겨내고 다시금 관심의 대상이 된 보졸레 와인! 그 매력은 과연 무얼까.

과거에는 유리병이 귀해 와인을 오크통처럼 커다란 용기에 담아 두고 덜어 마셨다. 통에 반쯤 남은 와인은 공기와 활발히 접촉하며 급속히 산화되기 시작했다. 날이 더운 여름이면 산화는 더욱 빨라져 와인에선 시큼한 맛이 나기 일쑤였다. 여름 내내 맛없는 와인을 마셔야 했던 사람들은 하루빨리 포도가 익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가을이 오고 마침내 포도를 수확해도 기다림은 계속됐다. 이제 막 발효를 마친 와인은 숙성을 거쳐야만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떫은맛을 내는 타닌 때문이다. 레드 와인은 포도를 으깬 뒤 껍질과 함께 발효하는데, 이때 껍질에서 붉은색과 타닌이 나온다. 타닌은 와인에 숙성잠재력을 부여하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하지만 갓 빚은 와인은 타닌의 떫은맛이 너무 강해 적어도 서너 달은 숙성시켜야 먹을 수 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올 즈음에나 겨우 맛볼 수 있다는 말이다. 여름 내내 시큼한 와인을 마셔온 사람들에게 더이상의 기다림은 무리였다. 그래서 와인이 익을 동안 마시기 위해 개발된 것이 바로 누보 와인이다.

누보 와인이란 우리말로 ‘햇와인’이라는 뜻이다. 누보 와인은 포도를 으깨지 않고 송이째 발효해 포도알 안에서 과즙의 발효가 시작되도록 만든다. 이런 양조 방식을 탄산침용(Carbonic Maceration)이라고 하는데, 이 방법을 사용하면 타닌이 거의 없는 와인이 만들어지므로 숙성 없이 바로 마실 수 있다. 맛도 여느 와인과는 상당히 다르다. 일반적인 레드 와인은 색이 진하고 묵직하지만 누보 와인은 색도 연하고 보디감이 가벼우며 상큼한 과일 향과 풍선껌처럼 달콤한 풍미가 가득하다. 마치 신선한 포도 주스 같은 맛이다.

프랑스 보졸레 지역에서 누보 와인을 만든 것은 19세기부터였다. 그런데 1950년대에 들어서자 타 지역에서도 이 와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보졸레 인근 도시인 리옹(Lyon)에서부터 인기를 얻더니 나중에는 수도인 파리에서도 보졸레 누보 주문이 몰려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보졸레 사람들에게 누보 와인의 인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들은 더 많은 관심을 끌기 위해 매년 파리로 누보 와인을 배달하는 경주를 벌였다. 마차는 물론이고 손수레, 오토바이, 대형 풍선, 심지어 코끼리까지 동원됐다. 이런 흥겨운 소동은 언론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대대적인 보도가 이어지자 보졸레 누보의 인기는 프랑스 전역으로 뻗어 나갔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가 해마다 11월이면 이 햇와인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선풍적인 인기는 보졸레 누보의 판매 개시일까지 바꿀 정도였다. 보졸레 와인협회는 11월 15일이었던 출시일을 11월 셋째 목요일로 변경했다. 보졸레 누보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주말에 바로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세계 각지에는 ‘Le Beaujolais nouveau est arrivé!(보졸레 누보가 왔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내걸렸고, 사람들은 가장 빨리 출시된 이 햇와인을 즐기며 축제를 즐겼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비난이 거세지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하고 저급한 와인이 장삿속과 마케팅으로 시장을 흐린다는 악평이었다. 보졸레 누보의 인기는 단숨에 추락했다. 농부들은 아예 포도 수확을 포기하거나 팔지 못한 와인을 증류소로 보내 공업용 알코올로 만들어야 했다. 엄청난 타격이었지만 보졸레 생산자들에겐 오히려 입에 쓴 좋은 약이 됐다. 이때부터 와인의 다양화와 고급화를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보졸레 와인을 만드는 재료인 적포도 ‘가메’.
보졸레 와인을 만드는 재료인 적포도 ‘가메’.

프리미엄 보졸레의 다양한 매력

보졸레 와인은 가메(Gamay)라는 적포도로 만든다. 똑같은 가메로 만들어도 보졸레 누보와 숙성해 만든 보졸레 와인은 맛이 완전히 다르다. 레이블에 보졸레 또는 보졸레 빌라주(Beaujolais -Villages)라고 적힌 와인을 마셔보면 체리, 딸기, 라즈베리 등 붉은 베리류의 향이 풍부하고 후추, 흙 등 숙성이 만들어낸 풍미가 복합미를 더한다. 보디감이 적당하고 타닌이 부드러워 다양한 음식과도 두루 잘 어울린다. 보졸레 누보가 편하게 즐기는 주스 같은 와인이라면 보졸레나 보졸레 빌라주 와인은 가메 본연의 매력을 맘껏 발휘한다.

보졸레 와인 중에 최상급은 보졸레 지역 에 위치한 10개의 뛰어난 마을에서 생산되는 크뤼(cru) 와인들이다. 생산량이 많지 않지만 크뤼 와인들은 최고급 품질과 개성을 자랑한다. 생 아무르(Saint-Amour), 플뢰리(Fleurie), 시루블(Chiroubles), 레니에(Régnié), 브루이(Brouilly) 마을에서 생산된 와인은 풍미가 섬세한 편이다. 딸기, 라즈베리, 레드 커런트 등 과일 향이 산뜻하고 아이리스 같은 꽃향기가 우아하다. 치즈, 햄, 올리브 등 가벼운 스낵류와 즐기기 좋은 스타일이다.

반면에 코트 드 브루이(Côte de Brouilly), 쥘리에나(Julienas), 셰나(Chénas), 물랭아방(Moulin-à-Vent), 모르공(Morgon) 마을에서 만든 와인은 힘차고 풍미가 진하다. 타닌의 질감이 탄탄하고 검은 체리, 블랙베리 등 검은 베리류의 향미가 농밀하다. 숙성잠재력도 좋아 4~5년 이상 병으로 숙성하면 가죽과 향신료 향이 발현되면서 탁월한 복합미를 선사한다. 이 와인들은 불고기, 닭볶음탕, 족발, 제육볶음 등 고기 요리와 잘 어울린다. 참고로 크뤼 와인을 구입할 때는 레이블에 보졸레 없이 마을 이름만 표기되어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보졸레 와인들을 김치와 비교하자면 누보는 겉절이, 숙성을 거친 와인은 김장김치라 할 수 있다. 겉절이가 오래 두고 먹는 김치가 아닌 것처럼 보졸레 누보도 묵히지 않고 출시된, 즉시 바로 즐기는 와인이다. 매년 새로 나온 누보의 신선함을 맛보는 것은 겨울 초입에 즐기는 특별한 이벤트다. 숙성된 가메의 참맛을 즐기고 싶다면 보졸레나 보졸레 크뤼 와인도 맛볼 것을 추천한다. 기대 이상의 멋진 테이스팅이 될 것이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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