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는 돈을 증오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자 도스토옙스키였다면 달랐을까? 모를 일이지만 증오하진 않았을 것 같다. 증오를 키우는 건 상처다. 상처는 종종 결핍에서 비롯된다. 돈이 없어서 상처받고 상처받은 사람은 돈을 증오한다. 돈을 증오하니 돈을 멀리하고 돈을 멀리하니 돈은 계속 없다. 가난과 증오는 서로의 꼬리를 물고 놓아 주지 않는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의 형국이 된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가난은 벌이기 때문이다.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한 형벌. 

나도 돈을 벌고 싶다. 벌 수 있는 한 많이 벌고 싶다. 돈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다. 갖고는 싶지만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서워하기 때문이라고. 가난은 벌이고 나는 벌 받고 싶지 않다. 돈이 많다고 상처 없는 삶을 사는 건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상처를 줄일 수 있다. 삶을 향해 달려드는 무차별적 모멸을 조금은 통제할 수 있다. 돈이 없는 게 무섭다는 말은 돈이 무섭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그러니까 내가 돈을 벌고 싶은 건 돈이 무섭기 때문이 맞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돈이 유일하다. 이런 게 또 있다면 정말로 불행할 거다. 

박완서가 197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도둑맞은 가난’은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칭하는 비참한 장면으로 끝난다. ‘쓰레기더미에 쓰레기를 더하듯이’라는 표현은 충격적일 만큼 자조적이다. 춥고 황폐한 방을 쓰레기더미에, 쓰레기더미가 아니면 제 한 몸 누일 곳 없는 막다른 존재인 ‘나’를 쓰레기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가난에 대한 증오를 다룬 작품일까. 오히려 그 반대다. 남들 눈에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이 집이 불행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나’에게 이 집은 그렇듯 시시한 불행의 증거가 아니다. ‘나’는 틀림없이 가난하지만 이 가난은 결코 ‘나’를 침범하지 못한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혈혈단신이 된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극심한 가난에 빠진 가족은 가난 앞에 덜덜 떤다. 가난한 삶에 상처받고 가난한 삶을 증오한다. 그러다 결국 연탄불을 피우고 문틈을 꽁꽁 봉한다. “나만 빼고 자기들끼리만 죽어 있었다”고 말하는 ‘나’의 냉소적인 목소리에는 자신만은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결기가 묻어 있다.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거라는 마음, 가난에 상처받지 않겠다는 마음, 가난을 증오하지 않겠다는 마음, 가난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끝내 도망쳐 버린 가족의 선택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마음. ‘나’는 가난에 자부심마저 갖는다. “내 가난은 나에게 소명이다.” 그런 ‘나’였다. 실패하면 안 되는 이유가 너무 많은 ‘나’였고 흔들리지 않는 ‘나’였다. 이렇게 비참한 결말은 그의 삶에 부당하다.

다시 엔딩컷으로 돌아가 보자. 가난에 끌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안간힘을 다해 삶을 끌고 왔던 주인공이 결국에는 털썩 주저앉는다. 바닥 모르고 떨어진다. 자신을 연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자신뿐이라는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 ‘나’도 함께 무너진다. 무너짐의 결정적 계기는 상훈이다. 진심으로 좋아했고, 가난한 줄 알았고, 그래서 함께 살며 미래를 꿈꿨던 상훈이란 존재의 반전이 ‘나’를 충격에 빠뜨린다. 상훈에게 ‘나’와 함께한 시간은 부잣집 아들의 밋밋한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 주는 이색 체험일 뿐이었다. ‘나’의 가난이 대상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도 타자화되었다. 대상화되고 타자화된 사랑은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가난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잘난 척하는 상훈에게 ‘나’는 다 포기한 사람처럼 대꾸한다.

“암 부끄럽고 말고. 부끄럽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당장 이 몸이 수증기처럼 사라질 수 있으면 사라지고 싶게 부끄럽다. 부끄럽다.”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는 부끄러움이 의미하는 건 뭘까. 상훈을 사랑한 자신이? 가난조차 독점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아직도 나는 인간에게 경이를 느낀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먼 미래 따위 볼 줄 모르고 자신이 파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이 그래도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만이 상처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와 슬픔은 인간을 파괴하려고 하지만 인간은 상처와 슬픔을 품고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때 그 상처와 슬픔은 오직 나의 상처, 나의 슬픔이어야 한다. 그때서야 슬픔도 상처도 자랑이 될 수 있다. 그때서야 ‘내 슬픔은 나에게 소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난을 도둑맞은 후 집은 더 이상 그 집이 아니고 가난도 더 이상 그 가난이 아니다. 악착같이 꾸려왔던 노력이 한순간에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물거품의 엔딩. 물거품은 최악의 엔딩이다.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리는 찰나는 가혹하다 못해 잔혹하다. 그러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물거품에 대한 절망은, 거꾸로 상처와 슬픔의 흔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려준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은 타인의 눈으로는 결코 해독할 수 없는 나만의 슬픔, 나만의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내 소중한 것을 마음대로 빼앗아 버린 신을 원망하고 싶을 때, 아주 가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한다. 모든 걸 잃어버려도 괜찮았던 주인공이 슬픔을 잃어버렸을 땐 주저앉고 말았던 마지막 장면이 종종 나를 일으켜 세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으로는 단편집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등이 있고,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이 있다. 일상적 삶의 소재를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날카로우면서도 현실적인 언어로 형상화하며 한국전쟁 이후 한국 현대인의 내면을 밀도 높게 기록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받았다. 2011년 별세했다.

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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