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롱리의 ‘헤르니와 플럼’. 표지는 그들의 카라반 식탁에 깔려 있는 유포식탁보를 본떴다. 사진 김진영
캐서린 롱리의 ‘헤르니와 플럼’. 표지는 그들의 카라반 식탁에 깔려 있는 유포식탁보를 본떴다. 사진 김진영

사진작가의 작업 방향은 작업을 진행하면서 우연한 계기로 바뀔 수 있다. 벨기에 사진가 캐서린 롱리(Katherine Longly)의 사진집인 ‘헤르니와 플럼(Hernie&Plume, 2020)’이 바로 그 예다.

캐서린은 2013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추운 겨울날 브뤼셀 근교의 한 캠핑장에 사진을 찍으러 갔다. 그가 찾은 장소는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 카라반(자동차 뒤에 매달아 끌고 다닐 수 있는 이동 가옥)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카라반은 이동용이 아닌 거주용으로 바퀴조차 달려 있지 않았다. 캐서린의 원래 계획은 카라반 주변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찍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고 있던 캐서린에게 카라반에서 나온 한 남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이냐고 물었다. 캐서린은 본능적으로 방어적 자세를 취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남자는 사과 후 자리를 뜨려던 캐서린에게 “들어와서 우리랑 맥주나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캐서린을 카라반 안으로 초대한 남성은 블리크(Blieke·본명 크리스)였다. 그는 카라반에서 그의 연인 니콜(Nicole), 강아지 플럼(Plume)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이 기르다 죽은 앵무새 헤르니(Hernie)도 한때 이들과 함께였다.

캐서린은 금세 따뜻하고 유쾌한 정서가 흐르는 이들의 작은 목재 카라반에 매료됐다. 카라반에는 이런저런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모아온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물건, 친구들의 선물이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카라반 중앙에는 큰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계절에 맞춰 고른 유포식탁보(oilcloth·물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한쪽 면에 기름 막을 입힌 천)가 깔려 있었다.

이날의 만남은 캐서린의 작업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캐서린은 블리크, 니콜과 친구가 된 뒤, 이들의 카라반에 자주 놀러 갔다. 그는 웃고 농담하길 좋아하는 두 사람과 카라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친구인 에미(Emmy), 팻(Pat), 베티(Betty), 미켈레(Michèle)와도 친구가 돼서 이들의 모습도 담을 수 있었다. 캐서린은 자신이 없을 때에도 이들이 순간순간을 기록할 수 있도록 일회용 흑백 카메라를 건넸다.

캐서린은 이렇게 찍은 사진으로 사진집 ‘헤르니와 플럼’을 구성했다. 이들이 사용하던 오래된 유포식탁보 하나를 스캔한 후, 유사한 재질의 천에 인쇄하는 방법으로 사진집 표지를 만들었다. 유포식탁보를 닮은 표지를 들추면 여러 종류의 사진과 텍스트를 차례대로 만날 수 있다.

이 책의 큰 매력 중 하나는 자칫하면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었을 요소를 절묘한 편집 디자인을 통해 잘 어우러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사진집에는 총 네 종류의 텍스트가 등장한다. 블리크가 받았던 연애편지와 블리크가 경찰이었던 시절 메모를 적어 스크랩해 둔 기사들, “어젯밤 너무 웃어서 아직도 배가 아프다”라거나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문자 메시지, 그리고 작가와 두 사람 간의 대화다. 독자는 사진집 속 글을 읽으며 이들이 25년 전 병원에서 만났다는 점, 블리크는 한때 경찰이었고 니콜은 브뤼셀에서 트램을 운전한 최초의 여성 기사 중 한 명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블리크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기억과 니콜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기억이 무엇인지 등 사진이 말해주지 않는 것까지 파악할 수 있다.


왼쪽부터 카라반 내 장식, 블리크와 그의 연인 니콜의 모습. 사진 김진영
왼쪽부터 카라반 내 장식, 블리크와 그의 연인 니콜의 모습. 사진 김진영
왼쪽부터 캐서린이 찍은 블리크의 사진 블리크가 경찰로 일할 당시 찍어놨던 자동차 사고 현장 사진. 사진 김진영
왼쪽부터 캐서린이 찍은 블리크의 사진 블리크가 경찰로 일할 당시 찍어놨던 자동차 사고 현장 사진. 사진 김진영

사진집에 실린 글은 양이 많지 않지만, 따로 분리돼 있던 여러 종류의 사진을 연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독자는 이들이 각자 살아온 인생과 함께한 인생을 전부는 알 수 없지만, 사진 속 주인공들이 함께 웃음을 나눈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 책에 담긴 이미지도 네 종류다. 먼저 작가 캐서린이 찍은 사진은 하얀 내지 가득 컬러로 담겼다. 일회용 흑백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책의 중앙에 배치된 갈색 종이에 실렸다. 책의 곳곳에는 과거 증명사진이나 스냅 사진도 배치됐다. 세월에 빚진 외모의 차이도 발견할 수 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사진도 캐서린이 찍은 사진과 해상도, 색감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카라반 어딘가에 있었을 사진 앨범이나 상자 같은 데서 꺼내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 편집할 때, 과거 장면에서 과거임을 느낄 수 있는 보정을 통해 관객이 과거와 현재를 분리해 볼 수 있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자동차 사고 현장이나 범죄 현장을 찍은 듯한 흑백 사진도 담겼다. 블리크가 경찰로 재직하던 당시 모아둔 사진인데, 작가는 이를 의도적으로 크게 수록해 현재화시킨다. 보는 이로 하여금 사진에 담긴 상황이 커플과 어떤 관계인지 되묻게 만든다.

작가는 범죄 현장을 담은 사진을 통해 ‘블리크와 니콜이 어쩌면 미국의 전설적인 범죄 커플인 보니와 클라이드 같은 인물이 아닌가’ 하는 독자의 편견을 끄집어내게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가지게 되는 사회적 편견과 우리의 좁은 시야와 마주하게 한다”고도 적었다. 책의 다양한 요소들은 독자가 인물들에게 갖게 되는 인상과 편견을 만들었다가 지우고, 지웠다 다시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쯤에서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작가는 왜 책 제목을 주인공의 이름인 ‘블리크와 니콜’로 하지 않고 ‘헤르니와 플럼’으로 정한 걸까? 작가에게 물어보자, 이렇게 답을 보내왔다. “독자가 이 책이 한 커플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면서, 이 커플이 농담하길 좋아한다는 점을 암시할 수 있어서 이 제목이 좋았다”고 한다.

사실 이 제목은 프랑스어 사용자가 볼 땐 정말 농담 같다. 프랑스어에서 ‘플럼’은 깃털이란 뜻이고, ‘헤르니’는 탈장이란 뜻이다. 붙여놓으면 더 이상한 두 단어는 사실 두 사람이 기르는 동물의 이름이다. 플럼(깃털)은 기르는 작은 강아지의 이름으로, ‘무겁지 않은 체구를 가졌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헤르니(탈장)는 과거에 길렀던 앵무새의 이름인데, 그 이름 뒤에는 두 사람의 추억이 담겨 있다. 한때 블리크가 병원에서 탈장 수술을 했을 당시, 니콜은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길을 매일같이 병문안을 와 유일한 방문객이 돼 주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블리크가 니콜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앵무새를 선물하고 헤르니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탈장과 깃털이라니! 제목의 유래를 알고 곱씹을수록 이 사진집의 사랑스러움은 배가 됐다. 두 사람과 어울리는 유머가 깃든 제목이라, 오히려 더 특별해지고 말았달까.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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