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의 소설 ‘소망 없는 불행’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어머니에 대해 쓴다. ‘나’의 어머니는 7주 전 자살했다. 신문을 통해 보도된 어머니의 죽음은 다음과 같이 간결한 문장들로 정리된다. ‘토요일 밤 A면(G읍)의 51세 가정주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 주인공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쓰고자 하는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어머니의 자살 사건을 대하는 낯선 인터뷰 기자보다는 자신이 어머니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믿기 때문에. 둘째, 무언가 할 일이 있으면 기운을 얻을 것 같아서. 셋째, 이 사건을, 그러니까 어머니의 자살을 하나의 사건으로 재현하고 싶기 때문에.

하지만 이렇듯 선명한 이유들은 불가해한 한 가지 이유로 수렴될 수도 있다. 완전히 말문이 막혀 버렸던 짧은 순간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그 욕망은 오랜 시간 그를 쓰게 만드는 동기이기도 했다. 그에겐 충격적인 순간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그러한 욕구는 언제나 글쓰기를 추동하는 가장 큰 욕망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이 소설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글쓰기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가 무엇에 근거하는 행위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어머니의 삶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시절의 어머니부터 기억 이전부터 존재했던 어머니까지. 말하자면 어린 시절의 어머니부터 죽음을 선택할 때까지의 어머니까지. ‘나’는 어머니의 삶을 추적하고 요약한다. 어머니를 살필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을 검토하고 살핀다.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마디로 그녀는 존재했고 성장해 갔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삶은 우리가 아는 많은 여성의 삶과 특별히 다를 것도, 특별히 같을 것도 없어 보인다.

많은 것을 소망했으나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을 쓰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작가로서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쓰는 과정에 대한 고민이다. 어머니의 죽음이 있고, ‘나’는 그것을 쓴다. 그러나 쓰면 쓸수록 어머니의 진짜 삶과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기억은 선택되는 것이고 ‘나’는 어머니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쓴다고 해서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것도 아닐 테지만. 아무튼 멀어지는 상황에서 작가가 선택하는 것은 적합하고도 특정한 형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다시 형식에 맞추어 이야기를 고른다. 현실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다른 현실, 즉 허구적 이야기가 되는 과정이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 탄생하는 과정 아닐까. 사실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허구의 지점에 도착하기까지의 경로.

그 경로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자. 소설이 진행될수록 우리에게 확실해지는 것은 이것이 어머니에 대한 죽음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쓰는 행위를 통해 소설을 쓴다는 것에 포함된 욕망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이어 간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회상의 쾌감이다. 공포로 가득한 사건을 외면하고 있던 가운데 지나간 사건을 서술한다는 것은, 즉 소설을 쓴다는 것은, 공포의 덩어리에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는 와중에 발생하는 회상의 쾌감을 인식하는 것이다.

“서술한다는 것이 단순한 회상의 과정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것은 다음을 위해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다. 즉 가능한 한 적합한 문장들로 기억에 접근해 가려고 노력함으로써 공포의 상태에서 작은 쾌감을 얻어내고, 공포의 쾌감에서 회상의 쾌감을 생성해 내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말하며 시작한 소설은 소설 쓰기에 대한 대답으로 마무리된다. 나중에 이 모든 것에 대해 훨씬 더 자세하게 쓰게 될 것이라는 말에는 지금 이 내용이 충분히 자세한 글이 아니라는 말을 포함하는 동시에 회상이 거듭될수록 자세해진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인류사에 남은 많은 작품이 작가가 경험한 가슴 아픈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힘든 일을 겪으면 그것을 쓰려고 한다. 가슴 아팠던 일을 떠올려 가며 가까스로 지나온 슬픈 일을 굳이 왜 마주하려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 마음에서 공포를 쫓아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자세히 쓰게 되는 일에 동반되는 회상은 인간을 비로소 인간으로 만드는 성찰적 행위다. 일기를 쓸 때 인간은 지난 하루를 회상하며 불분명한 덩어리로 존재하는 하루를 분절하고 세분화한다. 마음이 힘든 사람이 일기를, 아니 그 무엇이라도 쓰며 그때 그 사진을 복기하는 이유는, 그 시점을 돌아보는 것이 다만 공포의 행위만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말문이 막혀버리는 짧은 순간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쓸 수 있는 용기는 스스로를 공격하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회상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소망 없는 불행’은 그 제목이나 소제의 비극성과 달리 인간의 가능성과 소설이라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은 절망을 두려워하면서도 ‘새로운 절망’을 기다리는 모순되고 용기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년 오스트리아 케른텐주 그리펜에서 태어났다. 두 살도 못 돼 베를린으로 이사하는 등 성년이 되기까지 국경을 넘어 여러 곳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첫 소설 ‘말벌들’을 출간하면서 ‘47그룹’ 회합에 참석하였고 논문 ‘문학은 낭만적이다’, 희곡 ‘관객모독’을 통해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967년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상’을 받았고 희곡 ‘카스파’, 시 ‘내부 세계의 외부 세계의 내부 세계’, 소설 ‘긴 이별에 대한 짧은 편지’, 방송극 등 장르를 넘나드는 왕성한 창작력을 선보였다. 1973년 ‘실러 상’ ‘뷔히너 상’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빔 벤더스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 ‘베를린 천사의 시’를 썼다. 201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