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SG워너비의 김용준, 이석훈, 김진호. 사진 SBS
왼쪽부터 SG워너비의 김용준, 이석훈, 김진호. 사진 SBS

김태호-유재석 콤비가 또 한 번 음악계에 이슈를 만들었다. ‘놀면 뭐하니?’의 ‘MSG워너비’ 프로젝트로 SG워너비의 시대를 조망했고, 오랜만에 완전체로 방송에 출연한 SG워너비는 역주행을 시작했다. ‘Timeless’ ‘내 사람’ ‘살다가’ 등 그들의 과거 히트곡이 음원 차트에 올랐다. ‘Timeless’의 경우 5월 2일 SBS ‘인기가요’에서 2004년 첫 발표 후 17년 만에 1위 후보에 오르는 진기록을 쓰기도 했다.

그들이 재소환한 과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무한도전’ 시절 ‘토토가’를 통해 터보, 지누션, 김건모, 젝스키스 같은 90년대 댄스 음악 가수들을 소환했고 추억이란 메인 재료에 예능의 양념을 입혀 전국의 술집을 90년대 나이트클럽으로 만들다시피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들에게 스타덤을 선물하고, 유산슬이나 싹쓰리 같은 프로젝트로 트렌드를 만들며, ‘토토가’ ‘MSG워너비’로 과거를 현재에 이식하는 게 모두 가능한 예능인이 김태호와 유재석 말고 누가 있을까.

SG워너비가 인기의 정상에 서 있었던 건 2000년대 중반이다. 2004년 ‘Timeless’로 데뷔한 그들은 2005년 ‘죄와 벌’로 첫 차트 1위를 달성했고 ‘살다가’와 ‘내 사람’으로 2005년과 2006년을 그들의 시대로 만들었다. SG워너비의 천하였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때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폭발적인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우선 이야기할 게 하나 있다. 음악 산업에서 유행의 흐름은 생각보다 많은 요소가 관여한다. 새로운 악기의 발명, 레코딩 기술의 발전 그리고 시장의 환경 같은 것들 말이다. 2000년대 중반은 이 중 시장 환경이 가장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시기다. 안타깝게도 긍정적인 면은 없었다. 온통 부정적인 상황이었다.

21세기의 도래와 더불어, 음반 시장은 요동쳤다. 2000년대 초반 음악 산업계의 가장 큰 이슈는 냅스터의 등장이었다. P2P의 원조인 냅스터가 널리 퍼지면서 음악은 공짜가 됐다. 누구나 MP3 파일을 자유롭게 다운받고, 또한 공유하는 시대가 열렸다. 음반 산업계는 패닉에 빠졌다. 냅스터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벌어졌고, 소송으로 이어졌다. PC로 파일을 추출할 수 없는 형태의 CD가 개발됐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냅스터가 힘을 잃자 오디오 갤럭시, E-동키 같은 대체 프로그램들이 퍼졌다. 2003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튠즈 스토어를 론칭하며 ‘음원 시장’을 개척할 때까지 음악 비즈니스는 깊은 공백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냅스터에서 착안한 소리바다가 등장했고 음반 시장은 순식간에 타격을 받았다. 1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음반의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을 이끌었던 아이돌의 대가 끊기다시피 했던 이유도 음반 시장이 궤멸하면서 그때만큼의 수익을 창출할 방법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돌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비즈니스다. 대중음악이 지금처럼 ‘수출용’이 아니라 ‘내수용’으로 인식되던 시절이니 더욱 그랬다. 그 결과 기존 여러 멤버의 역할을 혼자 소화하는 비, 세븐 같은 가수들이 아이돌의 자리를 대체했다.

미국처럼 다운로드 시장이 형성될 수는 없었다. 메이저 음반 유통사 중심의 미국과는 달리, 한국은 이해관계가 너무나 다양했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게 음반을 대체했다. 휴대전화 통화 연결음과 싸이월드 BGM. 이 둘의 공통점은 둘이었다. 자기가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에게 들려주는 음악이었다. 그리고 음악을 끝까지 듣는 경우가 없었다. 특히 통화 연결음은 아예 노래 한 곡을 1분 내외로 끊어서 팔았다. 생선 한 마리를 토막 쳐서 파는 것과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음악이 갖고 있던 미덕, 즉 3분 30초 정도의 시간에 기승전결을 통해 쌓아가는 드라마는 설 곳이 없었다.


‘놀면 뭐하니?’에 나온 SG워너비. 사진 MBC
‘놀면 뭐하니?’에 나온 SG워너비. 사진 MBC

음반의 시대가 끝나면서 또 하나의 나비효과가 생겼다. PC의 저장 용량은 지금처럼 넉넉하지 못했고, 인터넷 속도도 지금보단 느렸다. 물론 MP3플레이어의 용량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고음질 대신 저음질로 압축한 음원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한 PC나 노트북이 음악 감상의 주요 기기가 되면서 보급형 PC 스피커가 널리 퍼졌다. 즉, 음악인들이 아무리 좋은 음질로 곡을 만들어도 정작 대중은 열화된 음질로 듣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당시 고(故) 신해철은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이 퇴행한 기술로 음악을 듣는 시대”라고 냉소했다. 나날이 발전해온 레코딩 기술, 세련미를 추구해온 음악 작법 같은 가치들은 시대의 흐름 앞에 무용했다. 한 유명 가수는 사석에서 “음반을 내는 의미를 모르겠다”며 잔을 비웠다.

SG워너비는 그런 시대의 산물이다. 미드템포 R&B(알앤비)라 불렸던 그들의 음악은 이 처참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은 이전의 음악과는 달리 기승전결의 구조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쥐어짜는 목소리로 시작해서 끝까지 쥐어짰다. ‘전전전전’이었다. 곡의 어떤 부분을 들어도 다른 부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컬러링으로 몇 초만 들어도 끝까지 들은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싸이월드 BGM과 통화 연결음으로 SG워너비가 각광받았던 이유다.

사운드 또한 기존의 음악과 달랐다. 한국 대중음악의 특징 중 하나가 연주보다 보컬을 강조하는 것이긴 했지만, SG워너비는 그 정도가 심했다. 유사한 창법의 목소리를 겹겹이 쌓아 사운드의 중심을 차지했다. 아니, 중심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을 차지했다. 따라서 휴대전화 스피커로 듣든, PC스피커로 듣든 음악이 전달하려는 감정을 즉각 연결할 수 있었다. 보컬만 강조됐으니 열화된 파일로도 음질의 차이를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결과 최악의 시장 상황에서 새로운 성공 모델이 등장했다. 모두가 그리로 달려갔다. 씨야, 엠투엠, 가비엔제이, V.O.S…그들과 비슷한 구성으로 그들과 비슷한 창법에 그들과 비슷한 노래를 부르는 그룹들이 쏟아졌다. 성대를 쥐어짜고 울어대는 이런 창법을, 누군가는 ‘소몰이 창법’이라 불렀다. 방송이건 휴대전화 가게 앞이건 가리지 않고 흐르는 이 ‘미디엄 템포 알앤비’는 마치 한국 대중음악이 축산 업계가 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트로트 정도를 제외한다면, 어느 시대나 트렌드는 젊은 세대가 소비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 시대의 트렌드는 세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곤 했다. 하지만 ‘소몰이 음악’은 그렇지 않았다. 세대와 상관없는 호불호의 대상이었다. 과거의 트렌드가 다시 돌아오면, 유사한 현재의 음악과 비교되기 마련이다. 예전과 지금의 장단점이 드러나는 법이다. ‘토토가’로 소환된 90년대 댄스와 현재의 K팝이 각각 특징이 있듯 말이다.

그런데 SG워너비 부류의 음악은 어떤가? 그런 부류의 음악을 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2007년 빅뱅의 ‘거짓말’, 원더걸스의 ‘Tell me’가 가져온 아이돌 르네상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한 스트리밍의 대중화 등등 격변한 시장 환경이 감정 과잉 음악의 설 자리를 자연스럽게 빼앗았기 때문이다. SG워너비가 다시 길거리에서 들릴 때마다, 나는 그때 그 끔찍했던 시장과 환경이 떠오른다. 단언컨대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한국 음악계가 가장 암울했던 시대였다. 추억으로도 미화할 수 없는 시대, 2000년대 중반의 음악 시장이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