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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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은 영화 ‘노마드랜드’가 받았다. 주연 배우이자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2017년에 원작을 읽고 반해 판권을 구입하면서 영화화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원작 ‘노마드랜드’의 부제는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다.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하퍼스 매거진’에 게재한 기사 ‘은퇴의 종말’을 바탕으로 길 위에서 차를 집 삼아 살아가는 노년의 삶을 3년 동안 밀착 취재해 담아낸 르포르타주다. 철 지난 유행쯤으로 흐려져 갔던 ‘노마드’란 말이 다시, 조금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도착했다. 아카데미가 노마드랜드를 호명할 때 그들이 부른 것은 작품 자체만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명사로 ‘유랑’을 호명했다.  

“60대가 되자 질문이 닥쳐왔다. 일을 그만두면 대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린다는 인생 대부분을 저축이라고 할 만한 것 없이 그달 그달 먹고살아 왔다. 그의 유일한 안전망인 사회보장연금은 위태로울 만큼 적었다. 한 달에 500달러(약 20만원) 안팎으로 먹고사는 퇴직자가 어떻게 되겠는가?”

미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21세기, 그중에서도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파이어족’과 ‘노마드 노동자’ 사이 어디쯤 있는 것 같다. 파이어족은 30대 말, 늦어도 40대 초반까지는 은퇴하는 것을 목표로 회사 생활을 하는 이삼십대 청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극단적으로 소비를 줄여 가며 은퇴 자금을 마련하는 이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젊은 고학력·고소득 계층을 중심으로 확산됐지만 지금은 한국에서도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그 반대쪽에는 온몸으로 은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끝이 없는 노동의 굴레 속에서 은퇴가 허락되지 않는 삶을 이어가는 노마드 노동자들이 그들이다. 젊은이는 조기 은퇴를 꿈꾸고 노인은 은퇴 이후 은퇴 없는 일자리를 쫓아다닌다. 조기 은퇴와 은퇴 종말의 공존은 은퇴가 이미 폐기된 개념임을 보여 준다.

임금은 낮고 주거 비용은 치솟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노마드 노동자들은 집세와 주택 융자금의 속박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계절성 노동을 하며 여기서 저기로 옮겨 다니는 그들은 ‘미국의 마지막 자유 공간으로 주차 구역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는다. 주차장을 거점으로 옮겨 다니는 동시에 정신과 문화는 중산층의 삶을 향유하는 이들은 지역을 옮겨 다니며 곳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과 부족을 이루기도 한다. 이들은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낯선 사람들과 동료애와 연대감을 나눈다. 정주하지 않는 삶에는 언제나 이별이 예정되어 있지만 이별이 전제된 사람들과의 만남은 이들을 한층 더 그들 자신으로 존재하게 한다. 이별을 삶의 기본값으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만남을 주저하지 않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스스로를 홈리스(homeless)가 아니라 하우스리스(houseless)라 부른다. 정주하지 않는 이들에게 홈은 부동산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 

책을 읽기 전에 영화부터 봤다. 보는 내내 쓸쓸했다. 궤도를 잃어버린 우주선처럼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배어 있는 짙은 고립과 고독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장면, 아마 영화의 클라이맥스처럼 보이는 그 장면에서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그러니까 쓸쓸함이라는 표현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를 느꼈다. 여느 사람들처럼 가족과 함께 머무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 곁에서 잠깐 시간을 보내던 주인공이 결국 다시 길 위로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벼랑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던 그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을 때 그 편안한 자유로움이 영상을 뚫고 나와 내게로 전해졌다. 그는 바람이 자신의 곳곳을 쓸고 지나갈 수 있도록 거침없는 발길로 땅을 밟았다. 벼랑 끝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땅을 즐기는’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애지중지하던 차마저 팔고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책의 마지막 장면은 좀 다르다. 영화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어느 노마드 노동자 린다가 책에서는 주인공이다. 책은 린다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땅에 대한 이야기로 끝맺는다.

린다의 희망은 ‘땅에 발붙인 것’들로 이루어진 어스십(earthship)을 짓는 것이다. 지구선을 뜻하는 어스십은 우주선(spaceship)에 대비되는 말로, 흙먼지와 남들이 버린 쓰레기로 이루어진 물질을 이용해 만든 수동형 태양열 주택을 가리킨다. 자본으로서의 땅은 인간을 머무르게 하지만 존재로서의 땅은 인간을 떠나게 한다.

‘노마드랜드’는 금융위기 이후 절망 속에서 표류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면서도 비탄에 잠기지 않는다. 땅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거주와 일자리라는 생의 필수 조건을 기존 질서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 길 위에서 찾아낸 삶의 방식. ‘No’mad보다 ‘老’mad에 가깝다 할 3년의 추적기가 땅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Plus Point

제시카 브루더(Jessica Bruder)

2015년 제임스 애런슨 사회정의 저널리즘상을 받은 저널리스트다. 주로 서브 컬처와 경제의 이면를 주제로 한 기사를 쓴다. ‘하퍼스 매거진’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경력이 있고 컬럼비아대학교 저널리즘 스쿨에서 강의하고 있다. ‘노마드랜드’는 ‘하퍼스 매거진’에 발표한 기사 ‘은퇴의 종말’을 바탕으로 저자가 3년 동안 차를 집 삼아 유랑하는 노마드 노동자들의 삶을 밀착 취재하고 자료 조사해 만든 논픽션이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로 타격을 입은 이들의 삶이 변화한 과정을, 저마다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따뜻하면서도 날카롭게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