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무사(公平無私)한 법 집행으로 중국 역사상 공정한 관리의 표상이 된 포증(包拯)의 행적을 극화한 대만 드라마 ‘포청천(包青天)’의 한 장면. 1990년대 국내에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포청천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정을 갈구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사진 포청천
공평무사(公平無私)한 법 집행으로 중국 역사상 공정한 관리의 표상이 된 포증(包拯)의 행적을 극화한 대만 드라마 ‘포청천(包青天)’의 한 장면. 1990년대 국내에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포청천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정을 갈구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사진 포청천

위진(魏晉)시대의 문인 좌사(左思)는 ‘삼도부(三都賦)’로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렸다고 해서 유명하다. 그의 또다른 명작인 연작시 ‘영사시(詠史詩)’에 이런 내용이 있다. “푸릇푸릇 계곡 아래 소나무, 하늘하늘 산 위 어린싹. 저 한 치 가는 줄기로, 이 백 척 가지를 덮고 있구나. 귀족은 대를 이어 높은 자리 오르고, 뛰어난 인재는 밑바닥에 묻혀 있다. 지세가 그리되게 하였으니, 하루아침 일이 아니라네(鬱鬱澗底松, 離離山上苗. 以彼徑寸莖, 蔭此百尺條. 世冑躡高位, 英俊沉下僚. 地勢使之然, 由來非一朝).”

외형만으로도 천양지차인 낙락장송과 어린싹이 나고 자란 곳에 따라서 높낮이가 구분되듯이, 사람도 자질과 능력에 관계없이 가문에 의해 귀천이 결정된다. 좋은 집안 출신은 변변치 못해도 일찍 높은 자리에 올라 잘살고, 그렇지 못하면 훌륭한 재능을 지녔어도 늙어서까지 출세 못 하고 가난에 허덕이는 세상이라는 이야기다. 바로 오늘날 대중이 분노하는 금수저와 흙수저, 용과 가재에 대한 풍자이며,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비판이다.

모든 것이 진보되어야 할 첨단 문명사회에서 불공정은 반대로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대중도 옳고 그름과 공정 여부는 따지지 않고, ‘내 편이면 감싸고 반대편이면 공격한다(黨同伐異).’ 심지어 우리 쪽이면 떼를 지어 “내가 조국이다”라고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외치기(大言不慚)’까지 한다. 잘살고 못살고, 많이 배우고 덜 배우고,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나라 안 공사(公私) 구석구석이 다 그렇다. 이런 판국에 공정을 부르짖어봐야 공염불에 불과할지 모른다.

세상의 불공정을 필자는 3년 병역을 마친 1970년대 말 이후에 실감했다. 심신이 지극히 정상인 사람 중에 병역 면제자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제대한 다음에야 알았다. 1980년대에는 석사장교라는 제도까지 생겼다. 장삼이사(張三李四)가 2년 석사과정 마쳤다고 훈련 6개월 받은 뒤 바로 소위 계급장 달고 전역했다. 당시 권력자 아들에게만 특혜주기가 낯간지러워 그런 제도를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죄를 뒤집어씌우려면 어찌 구실 없음을 근심하겠는가(欲加之罪, 何患無辭)?’라는 말이 있는데, 최근까지도 권력층에서 횡행하는 이런 부류의 여러 작태에 다음의 대구가 적격이다. “혜택을 베풀려 하는데 어찌 핑계 없음을 걱정하겠는가(欲施之惠, 何慮無憑)?” 병역 불공정의 경우, 그 결과는 사회생활에서 (남녀 불문하고) 과거의 선후배 사이까지 뒤바뀌게 한다. 사회에서의 불이익이 그만큼 커지는 셈이다.

이런 불공정한 현상을 두고 2500년 훨씬 이전의 ‘시경(詩經)’에 울분을 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누구는 편안한 자리에서 즐겁게 쉬는데, 누구는 나라 위해 등골 빠지게 힘을 쓴다. 누구는 할 일 없이 침대에서 뒹굴고, 누구는 고된 행군 끝이 없다. 누구는 상관 호령이 뭔지 모르는데, 누구는 불쌍한 몰골로 사역에 끌려간다…누구는 쾌락에 빠져 술 마시고, 누구는 문책 겁내는 참담한 신세란다. 누구는 이리저리 다니며 노닥거리는데, 누구는 온갖 궂은일 하지 않는 것이 없다네(或燕燕居息, 或盡瘁事國. 或息偃在床, 或不已于行. 或不知叫號, 或慘慘劬勞…或湛樂飲酒, 或慘慘畏咎. 或出入風議, 或靡事不爲).”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것이 일반 사람들의 소박한 정서다. 하물며 나보다 나을 것 없는 사람이 수상하게 높은 자리에 앉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특혜를 누린다면 마음이 편할 수 없다. 더구나 합리적 이유 없이 내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 때, “이를 참을 수 있다면 세상 그 어떤 일을 못 참겠는가(是可忍也, 孰不可忍也)?”

문명사회에서 불공정은 반대로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문명사회에서 불공정은 반대로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세상의 혼란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예부터 현인들이 모두 국가 경영의 최우선 과제로 공정을 꼽았다.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이렇게 말한다. “옛 성군들이 세상을 다스림에 반드시 공정을 앞세웠다. 공정하면 세상이 평화롭다(昔先聖王之治天下也, 必先公. 公則天下平矣).” ‘순자(荀子)’는 “위가 공정하면 아래도 곧아지기 쉽다(上公正, 則下易直矣)”고 했고, ‘논어’에도 “공정하면 모두가 기뻐한다(公則說)”는 말이 있다. ‘관자(管子)’는 “윗사람이 공정하게 정사를 논하고 법과 제도대로 처리하면, 천하의 중임을 맡고도 무거운 줄 모른다(上以公正論, 以法制斷, 故任天下而不重也)”고 공정의 중차대함을 강조하면서, 세상이 불공정한 근본 원인을 설파한다. “지금 무능하고 무도하여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사욕과 사감을 가진 탓에, 보고 싶은 것만 보니 보이지 않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니 들리지 않으며,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니 알지 못한다(今亂君則不然. 有私視也, 故有不見也, 有私聽也, 故有不聞也, 有私慮也, 故有不知也).” 이에서 그치지 않고, 사익 챙기고 내편 감싸기에 급급하다 보니, 보고 듣는 바가 많아도 버젓이 모른 체하기가 예사다.

지금의 나라 꼴은 한마디로 위정자는 공정하지 않고, 공직자는 청렴하지 않다. 이 때문에 검소와 근면을 미덕으로 삼던 대중도 중심을 잃었다. “국가 경영의 요체는 공정과 청렴이며, 가정을 일으키는 길은 검소와 근면이다(爲政之要, 曰公與清, 成家之道, 曰儉與勤)”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의 교훈과 정반대의 상황이다. 권력 가진 자들이 저 모양이니 대중도 빈부를 떠나 온통 불로소득만 좇고, 부유층은 사치와 방종으로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에 많은 젊은이가 근검절약과 노력이 무의미한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일확천금을 꿈꾸며 빚을 내어 주식 투자와 암호화폐 투기에 골몰하는 기괴한 세상이 됐다.

공정한 세상을 위해 도덕과 윤리를 들먹이지만, 다중이 탐욕에 빠져 있는 복잡다단한 현실에서는 공론에 가깝다. 그저 병자에게 주는 영양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체질에 맞는 사람에게나 효력이 있다. 근본적인 대책은 역시 치료와 수술이다. 결국 강력하고 정의로운 법치밖에 없다. 법이 미비하면 언론과 대중의 비판과 항의로 보완해야 한다. 문제는 법보다 이를 집행하고 관리하는 자들이 공정하지 않아 법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언론은 용기와 신념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와 비판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며, 대중은 끊임없이 투쟁하고 항거해야 한다.

일본 에도시대 말기 사토 잇사이(佐藤一斎)의 ‘언지사록(言志四錄)’에 “치란의 관건은 공정과 불공정에 있다(治亂之機, 在於公不公)”는 말이 보인다. 불공정이 지나치면 반드시 민초의 격렬한 저항이 뒤따른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