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플랑드르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가 그린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사진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17세기 플랑드르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가 그린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사진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17세기 플랑드르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가 그린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라는 그림이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천상의 신들이 사용하는 불을 훔쳐서 인간 세상에 전해준 인물이다. 루벤스는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산 프로메테우스가 혹독한 처벌을 받는 장면을 포착한다.

코카서스산맥 한쪽 벼랑 끝에 꼼짝달싹 못 하게 쇠사슬에 포박된 프로메테우스.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프로메테우스의 안면을 짓누른다. 부리로는 프로메테우스의 옆구리를 쪼아 간을 파먹는다. 3만 년 후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구해줄 때까지, 프로메테우스는 매일 같은 벌을 받아야 했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폰태너에 의하면, 불은 ‘신들의 세상과 인간 세상을 구별해주는 지혜’를 상징한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명령에 도전하는 용기’를 상징한다. 과연 대각선으로 걸쳐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벌거벗은 몸은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영웅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지만, 매서운 눈은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를 응시한다.

‘그리스신화’의 저자는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 간의 극도의 긴장 관계를 통해 불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인간과 유인원의 결정적인 차이는 불의 사용에 있다. 특히 불이 포식자에 대한 방어와 추위를 막는 난방 용도를 넘어, 음식물을 요리하는 데 쓰이면서 둘 사이의 간극은 확연해졌다.

바야흐로 캠핑의 계절이다. 한겨울에도 야영을 즐기는 마니아가 많아졌지만, 일반인은 아무래도 따뜻한 계절이 좋다. 이렇게 캠핑을 가면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바로 바비큐 파티일 것이다. 주택에 너른 야외 정원이 있는 미국과는 달리, 한국은 아무래도 캠핑장이나 별도로 바비큐 시설을 갖춘 콘도나 펜션이 아니라면 바비큐 파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캠핑장에서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바비큐를 즐기기 위해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 사람은 십중팔구 남자다. 왜 그럴까? 맞벌이 시대 가사를 분담한다고는 하지만 평소 가정에서 주로 가사는 여성들에게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야외에 나와서만이라도 가족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남성들의 의무감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다.

과연 그게 전부일까? 진화심리학자 유르겐 브라터의 말을 빌려 보자. “어스름한 황혼 녘에 희미하게 불을 밝힌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는 것만큼 운치 있는 일은 없다. 특히 남자들은 날고기를 구수하고 맛있게 구워냈을 때, 힘들여 노획한 사냥감으로 씨족을 배불리 먹였던 석기 시대의 사냥꾼 같은 기분을 느낀다.”

바로 그것이다. 남자들은 바비큐 자리에서, 우리 인류가 수만 년 전 사바나에 살며 사냥과 채집을 일삼던 시절의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오늘은 그 옛날처럼 직접 사냥해온 고기는 아니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숯불을 지피고 직접 고기를 구워 부족민, 아니 우리 가족을 배불리 먹인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해진다.


진화심리학자 유르겐 브라터는 “바비큐 파티에서 남자들은 날고기를 구수하고 맛있게 구워냈을 때, 힘들여 노획한 사냥감으로 씨족을 배불리 먹였던 석기 시대의 사냥꾼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말했다.
진화심리학자 유르겐 브라터는 “바비큐 파티에서 남자들은 날고기를 구수하고 맛있게 구워냈을 때, 힘들여 노획한 사냥감으로 씨족을 배불리 먹였던 석기 시대의 사냥꾼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것은 분명 사냥꾼으로서의 남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고, 가정 내에서의 심리적 지위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반대로 여성들의 경우는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대접받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심리적 지위가 올라간다. 남녀의 심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직장의 회식이나 다른 식당에서 외식할 때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더 분명해진다.

직장에서 회식할 때 고기를 굽는 사람은 대개 그 부서에서 가장 직위가 낮은 막내 직원이다. 어떤 경우는 이 막내 직원의 역할을 식당 종업원이 대신한다. 가정의 경우와는 달리 불을 지피고 고기를 굽는 역할을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 맡게 되는 것이다.

남자들이 회식 자리에서 이른바 ‘폭탄주’를 제조할 경우가 있다. 이때 제조자는 그 자리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거나 혹은 그가 지정한 사람이 맡는다. 술꾼들은 이를 술병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뜻에서 술병병(甁) 자를 써서 ‘병권(甁權)’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분명 옛날 병사나 말을 다스리는 권력이나 지위를 뜻하는 ‘병권(兵權)’이라는 말을 연상시키다. 중국 삼국시대 조조가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 즉 천자를 옆에 끼고 제후들을 호령할 수 있었던 것도 조조가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 미얀마 군부 쿠데타도 마찬가지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지금은 자동회전구이 기계가 도입됐지만 당시 양꼬치집에서는 사람들이 꼬치를 직접 숯불에 구워야 했다. 1990년대 중국 베이징 뒷골목에서 꼬치 굽는 방법을 어깨너머로 배운 적이 있는 내가 친구들을 데리고 양꼬치집에 가서 현란한(?) 솜씨로 양고기를 구워줬다.

내가 직접 양고기를 구워 대접한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말했다. “너 이거 보여주려고 양꼬치집 오자고 그랬지?” 나는 의식적으로는 친구들을 대접한다는 서빙의 기쁨을 즐기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리에서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본능이 작동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눈치 빠른 친구가 내 심층 심리를 들여다본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때 출간되지도 않았던 유르겐 브라터의 책에 나오는 “남자는 불을 다룸으로써 만인 앞에서 축제의 중심이 된다”는 말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므로 여성들이여! 남성들이 바비큐 파티장에서 숯불을 지피고 고기를 굽는다면서 다소 어설픈 모습으로 설치더라도 불안해하지 말고, ‘아하! 저 사람, 사냥꾼 본능이 발동하는구나!’ 하고 너그러이 웃어넘기시라.


▒ 김진국
문화평론가, 고려대 인문예술 과정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