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개 사회일수록 금기가 많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 합리적 사고가 결여돼 미신이 성행하기 때문이다. 금기가 많으면 성역도 그만큼 많아질 수밖에 없다. 사진은 내용과 큰 관련이 없음.
미개 사회일수록 금기가 많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 합리적 사고가 결여돼 미신이 성행하기 때문이다. 금기가 많으면 성역도 그만큼 많아질 수밖에 없다. 사진은 내용과 큰 관련이 없음.

후한(後漢) 초의 명사 엄광(嚴光)은 본래 장(莊)씨였으나, 제2대 황제의 이름이 유장(劉莊)인 까닭으로 사후에 성이 바뀌었다. 창업 군주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한 그는 후일 황제 친구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낚시로 여생을 보낸 지조의 은사(隱士)로 후대에 이름을 남겼으나, 친구 아들로 인해 조상과 다른 성으로 전해지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이런 일은 중국 역사상 셀 수 없을 정도로 허다하다. 초한(楚漢) 쟁패기의 재사 괴철(蒯徹)은 한무제(漢武帝)와 이름이 같아서 ‘사기’에 괴통(蒯通)으로 기록되고, 청초(清初)의 대표적 문인 왕사진(王士禛)은 사후 얼마 뒤 청 세종(清世宗) 윤진(胤禛)과 같은 글자를 썼다는 이유로 왕사정(王士禎)이 되어야 했다. 유명한 왕소군(王昭君)도 서진(西晋)의 초대 황제 사마염(司馬炎)의 아버지 사마소(司馬昭) 때문에 졸지에 명비(明妃)로 불렸다. 역사 인물의 경우에는 그 성이나 이름이 바뀌는 데서 그치지만, 당대인이 해당 글자를 사용하면 혹독한 처벌이 가해졌다.

‘피휘(避諱)’라는 중국 역사상의 이런 악습은 고려 중기에 한반도에도 정착되어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인명과 지명과 관명 등 일체의 명칭과 문자 생활에서 당대는 물론 역대 왕들의 이름자까지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왕들의 이름이 이성계(李成桂)와 이방원(李芳遠)을 제외하고 모두 외자에다 특이한 글자인 현상도 대중의 문자 생활에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왕조에서는 그러한 배려라도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역대 군주들의 이름이 대부분 상용자였다. 그러면서 그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한 것은 절대 권력으로써 ‘금기’와 ‘성역’을 만들어 대중을 괴롭힌 야만적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길에 함정을 파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꼴이다.

군주의 이름자뿐만 아니라, ‘최고 존엄’에 조금이라도 저촉되거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극도로 처참한 형벌까지 내려졌다. 특히 명청(明淸) 양대에 그러한 만행이 극에 달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젊은 시절 가난으로 인해 생계유지 차원에서 승려가 되어 고생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글자들을 신경질적으로 꺼렸다. ‘승(僧)’ 자는 물론 가장 평범한 ‘광(光)’ 자도 승려의 머리를 연상시킨다고 싫어했으며, 발음이 비슷한 ‘생(生)’ 자만 들어도 과거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신하의 글 중에 이런 글자가 발견되면 트집을 잡아 수차례나 극형에 처했다.

옹정제(雍正帝)로 불리는 청 세종은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시경’의 구절을 과거에 출제했다는 이유로 총괄고시관과 그 일족을 잔인하게 살육했다. ‘維’와 ‘止’가 ‘雍’과 ‘正’의 머리를 제거한 모양이니 황제를 모독했다는 죄목이었다.

이런 사건들이 이른바 ‘문자옥(文字獄)’이다. 뜻밖의 ‘문자옥’을 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늘 ‘깊은 연못에 나아간 듯이, 살얼음을 밟듯이(如臨深淵, 如履薄冰)’ 불안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미개 사회일수록 금기가 많다. 오늘날의 문명사회에서도 미신에 빠진 사람들이 각종 금기를 철저히 지키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금기를 과학적인 검증과 합리적인 확인 없이 막연하게 정서적으로 믿고 맹종한다.

사회와 정치 영역에서의 금기도 적지 않다. 성역은 금기를 권력으로 대중에게 강요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대중 모두가 마음에서 우러나 존경하고 신성시한다면 ‘성역’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공문(孔門)의 대표적 진보 인사였던 재아(宰我). 원래 이름은 재여(宰予), 자는 자아(子我). 그는 당대 정권의 강권 통치를 사직의 밤나무에 빚대어 비판했다. ‘밤 율(栗)’과 ‘전율’의 ‘慄’이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사진 바이두
공문(孔門)의 대표적 진보 인사였던 재아(宰我). 원래 이름은 재여(宰予), 자는 자아(子我). 그는 당대 정권의 강권 통치를 사직의 밤나무에 빚대어 비판했다. ‘밤 율(栗)’과 ‘전율’의 ‘慄’이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사진 바이두

최근 소위 ‘진보’ 정치권 인사들이 우리 근현대사의 몇 가지 불행한 일에 대하여 대중이 함부로 언급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처벌하는 특별법을 만들겠다면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들만의 기준과 판단으로 과학적이지 않은 ‘금기’를 정해 놓고 강압적으로 ‘성역화’하려는 의도다. 그야말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수백 년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위험하고도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모든 국민이 근 80년이나 지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의무적으로 분노하고, 5·18에 대해서 의무적으로 경건하며, 세월호 사고에 대해서 의무적으로 애도하기를 강요하겠다는 것이다. 다양한 시각의 의견 제기를 법적으로 원천 차단하고, 불응하면 현대판 ‘문자옥’을 일으킬 태세다.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도 진보와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강권을 휘두르다가 소식(蘇軾)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았다. “글쓰기의 쇠퇴함이 오늘날과 같은 적이 없다. 그 원인은 바로 왕씨에게 있다. (중략) 왕씨는 자신의 지식으로 천하를 동화시키려 한다. 모든 땅이 초목을 키우는 것은 같지만, 좋은 땅에서 나는 초목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황폐하고 척박한 땅에서는 온통 ‘누런 띠와 흰 갈대(黃茅白葦)’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권력을 쥔 왕안석이 자신만의 가치 기준으로 반대파의 ‘언론 자유’를 핍박한다고 성토한 것이다.

과거사에 대하여 과학적 조사와 학술적 접근도 막은 채 금기를 강요하고 특정 세력과 정권이 정해 놓은 성역을 범하면 처벌한다는 것은 야만 행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 역사의 최대 비극인 6·25를 ‘항미원조’ 전쟁으로 부르고, 고구려도 제 역사이며, 심지어 한반도 자체가 원래 자국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는 중국에 대해서는 누차 굴욕을 당하면서도 상국(上國) 대하듯 하면서, 정작 제 국민의 언론과 학문의 자유는 강권으로 통제하겠다는 편협하고 극단적인 작태다.

‘논어’에는 사직(社稷)에 관한 재아(宰我)의 의미심장한 말이 실려 있다. “하나라 때는 소나무를 심고, 은나라 때는 잣나무를 심었으나, 주나라에 와서는 밤나무를 심었다. 이는 백성들이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함이다(夏后氏以松, 殷人以栢, 周人以栗, 曰使民戰栗).” (‘전율’은 ‘慄’ 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이므로 동음의 ‘栗’ 자를 빌려 썼다.) 토지신과 곡신을 모시는 사직은 국가 권력의 상징으로 최고의 성역이었다. 이곳에 소나무나 잣나무를 심었던 전대와 달리 당대에는 밤나무(栗)를 심어서 백성에게 정신적인 위압을 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대의 정권이 공포 정치를 펴고 있다는 우회적인 비판이다. 재아는 공자 문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런 만큼 비판의식이 강한 그는 스승과 의견대립까지 벌여 유달리 미움을 샀다. 이 발언으로도 공자로부터 비난을 당해야 했지만, 그의 이러한 정권 비판은 대단히 괄목할 만한 정의롭고도 진보적인 견해다.

지금 국내의 이른바 진보 인사들은 고대 중국의 진보 인사 재아와는 정반대로, 자신들이 만든 성역에 대중을 전율케 하기 위한 밤나무를 심으려 한다.


▒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