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김진영
시간 김진영

대형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친구 A가 있다. 그를 건축가라고 부르면 A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나 건축가 아니야. 나 건물 지어.” 자신을 회사원이라 말하는 A는 강남 한복판에 짓는 오피스텔이라든지 여의도에 짓는 고층건물, 부산에 짓는 주상복합아파트 등을 설계하는 회사의 일원이다.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다 자기 작업을 하고 싶다며 작은 건축사무실을 운영 중인 친구 B가 있다. 그는 지역 체육관이나 주민센터, 교외 지역의 주택, 학교 시설 등 여러 건축 공모전에 참가하여 때로는 입상을 했다. 건축가가 되고자 한다고 말하는 B 역시 꾸준히 설계 도면을 그리고 있다.

영국의 미술사학자이자 건축사가인 니콜라우스 페브스너가 쓴 ‘유럽 건축사 개관(1983)’에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자전거 보관 창고는 건물이고, 링컨대성당은 하나의 건축이다. 사람이 들어가는 데 충분한 공간을 지닌 거의 모든 것이 건물이지만, 건축이라는 말은 미적 감동을 목표로 설계된 건물에만 적용된다.” A와 B에게서도 그러하듯 사회에서 흔히 통용되는 건축과 건물의 구분은 이러한 정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경제적 논리, 기능적 논리, 미적 논리의 균형추가 어디로 기울었는지에 따라 규정이 달라진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지어진 대부분의 무언가는 ‘건물’이고, 매우 소수만이 ‘건축’에 해당할 것이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이러한 좁은 의미의 건축은 5% 미만이다. ‘건축 사진’이라 불리는 사진 장르 역시 보통 좁은 의미의 건축을 대상으로 한다. 책으로 출간되는 경우는 유명 건축가의 건축물을 찍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7년작 ‘형태의 아틀라스(Atlas of Forms)’는 그런 점에서 독특한 사진집이다. 왜냐하면 사진가 에릭 타부치(Eric Tabuchi)가 세상에 분명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나머지 95%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완성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가 흥미롭게 여긴 것은 유명한 건축가의 건축물이나 누구나 아름답다고 말할 법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그는 건축가의 유명도나 건축물의 미적 완성도 같은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형태’의 관점에서 지어진 것을 바라봤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의 사진들을 작가가 직접 찍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본래 버려진 주유소나 특정 지방의 토속적인 건축 양식 등에 관심을 가지고 카메라를 든 사진가다. 직접 사진을 찍던 사진가가 수집한 사진들로만 책을 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는 건강에 문제가 생겨 사진을 직접 촬영하지 못하게 되자, 작업 방식을 바꾸어 수개월간 온라인에서 이미지를 수집하기로 했다.

온라인 역시 매 순간 운과 직감에 따라 이동해간다는 면에서 실제 세계를 여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작가가 거주하는 파리에서 출발한 이 여정은 곧 러시아, 중국 등 작가에게 생소한 곳까지 뻗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사진가의 사진은 배제하고, 일반 사람이 찍어서 올린 사진이나 여행객이 여행하며 찍은 사진, 혹은 건축 회사가 정보 차원에서 올린 사진 등 수많은 익명의 사진가가 남긴 사진들을 수집했다. 그런데도 마치 한 사람이 찍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우선 형식 면에서 대상이 프레임 중앙에 꽉 들어찬 사진을 골랐다. 그 후 수집된 사진들의 기본적인 수직과 수평을 최대한 맞추었고, 색과 콘트라스트를 보정하는 후반 작업을 거쳤다. 그 결과 한 사람의 작업물 혹은 백과사전과 같은 곳에서 제공하는 자료처럼, 전체 톤을 비교적 일관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다음, 작가는 이미지를 분류하는 몇 가지 기준을 도입했다. △원형, 사각형, 삼각형, 다각형 등 기하학적 기준 △소형, 중형, 대형 등 규모의 기준 △건축 중인 상태, 완성된 상태, 버려진 상태, 파괴된 상태 등 현재 기능성 기준을 교차 적용하여 사진을 분류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태의 아틀라스’에 건축물 사진 1500여 점을 수록했다.


1. 경제적 논리에 따라 촘촘히 규칙적으로 쌓아올려진 형태의 건물들. 2. ‘형태의 아틀라스’에 담긴 다각형 모양의 건물들. 3. 사진집에는 언제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찍었는지와 같은 텍스트 정보가 전혀 없다. 4. 에릭 타부치는 관습적인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 책을 만들고자 했다. 사진 김진영
1. 경제적 논리에 따라 촘촘히 규칙적으로 쌓아올려진 형태의 건물들.
2. ‘형태의 아틀라스’에 담긴 다각형 모양의 건물들.
3. 사진집에는 언제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찍었는지와 같은 텍스트 정보가 전혀 없다.
4. 에릭 타부치는 관습적인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 책을 만들고자 했다. 사진 김진영

오로지 형태의 관점에서 바라본 덕에, 모든 건축물은 설계자의 명성이나 소요된 자본과 같은 요소와는 무관하게 모두 동등하게 대우된다. 표지에 적힌 제목과 내지의 쪽수를 제외하면, 언제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찍었는지와 같은 텍스트 정보가 전혀 없다. 르코르뷔지에, 프랭크 게리, 자하 하디드 같은 거장의 ‘건축’도 이름 모를 ‘건물’과 나란히 함께 수록되어 있다. “관습적인 정보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책을 만들기로 했다. 하찮은 것이든 성스러운 것이든, 초라한 것이든 화려한 것이든, 웅장한 것이든 황폐한 것이든, 모든 형태가 평등한 관계 속에 공존하는 책 말이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형태의 아틀라스’에서는 5%의 건축과 95%의 건물이라는 통계치가 무의미해질 수 있었다.

‘건축’의 관점에서 높게 평가되지 않거나 배제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형태들을 이 책에선 찾아볼 수 있다. 경제적 논리에 따라 촘촘히 규칙적으로 쌓아올려진 형태, 건축의 일반 논리를 따르지 않는 다양한 장식과 구조물이 첨가된 형태, 배나 비행기, 동물이나 공룡, 시계나 모자 등 다른 무언가를 모방한 직관적인 형태까지 말이다.

“기본적으로 지난 20여 년간 내가 주목했던 것은 익명의 건축이라는 방대한 분야였다. 이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인류에게 있어 매일매일의 환경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마치 아무런 특징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만다.”

작가는 위대하고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건축물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 세계를 들여다보자고 제안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처럼, 다채로운 형태의 반복과 파열, 조화와 불협은 건축물에 대한 우리의 실제 경험과 닮았다. 이 책을 보면서, 한남대교 위에 솟아 있는 전망카페의 각진 생김새, 국내 여행을 하며 곳곳에서 마주했던 유럽 성을 닮은 호텔들의 모습, 미국 서부 여행에서 본 배를 모방한 호텔 등,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 남아 있던 여러 기억이 떠오른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에릭 타부치는 현재 온라인 사이트(atlas-of-forms.net)를 운영 중이다. 사이트는 방문자가 왼쪽 상단에서 여러 기준을 선택하여 원하는 형태를 찾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한 작가에게 사진을 보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형태의 아틀라스’ 확장에 기여할 수도 있다. 사람들 각자가 다양한 것만큼이나 사람이 지은 것도 다양하다고 말하는 그의 말처럼,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형태를 그의 아틀라스는 앞으로도 담아낼 것이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