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 감사비. 사진 민학수 기자
박세리 감사비. 사진 민학수 기자

대전 유성컨트리클럽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아름드리 장송(長松)이 즐비하다. 곧 승천할 듯한 용처럼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50년 이상 된 소나무가 60만 그루나 있다. 수령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를 비롯해 보호수도 코스 내에 여럿 있다. 마스터스가 열리는 미국 오거스타내셔널이 육묘장 부지에 들어선 것처럼 이곳도 과거 충청남도 임업시험장이었다. 이곳에선 매년 한국 여자골프 스타의 산실인 강민구배 한국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 대회가 열린다.

1976년 창설된 이 대회는 2000년부터 유성컨트리클럽에서 줄곧 열리고 있다. 2005년부터 고(故) 강민구(1926~2014년) 유성컨트리클럽 명예회장의 이름을 따 강민구배로 불리고 있다. 강은모 유성컨트리클럽 대표 이사는 매년 대회 기간 대한골프협회에 5000만원의 골프 발전 기금을 전달하고 있다. 유성컨트리클럽은 지난 17년간 약 9억원의 골프 발전 기금을 후원했다.

7월 2일 막을 내린 강민구배 제45회 한국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 대회에서는 아마추어 국가 대표인 황유민(18·신성고 3)이 3라운드 합계 14언더파 202타로 54홀 최저타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황유민은 신지애(2005년)와 권서연(2017년)이 갖고 있던 이 대회 54홀 203타 기록을 1타 경신했다. 황유민은 코스 난도를 몹시 어렵게 해 9명만 언더파 스코어를 작성한 올해 한국여자오픈에서 아마추어 최고 성적인 공동 4위(4언더파)에 올랐던 기대주다.

황유민은 “내셔널 타이틀 대회인 한국여자오픈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데 이어 강민구배 한국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감격스럽다”며 “내년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KLPGA와 LPGA에서 활약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공격적인 경기를 좋아하고 아이언 샷과 퍼팅에 자신이 있다”며 “김효주 프로의 여유와 스마트한 경기를 닮고 싶다”라고 했다. 그는 163㎝의 크지 않은 체구지만 260야드 드라이버 샷을 날린다.

박상현과 김효주 등을 지도하는 전 국가대표 감독 한연희 프로에게 배우고 있는 그는 2019년 동계 전지 훈련 기간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했다. 김효주와 연습 라운드도 해보고 프로 선배들의 훈련 모습을 보며 느끼는 게 많았다고 한다.

강형모 대한골프협회 부회장은 “황유민은 프로 골퍼들도 어려워할 정도로 코스를 까다롭게 만들었던 한국오픈에서 상위권에 든 데 이어 이번 대회에서 54홀 최저타 기록을 세웠다”며 “승부처에서 집중력이 뛰어나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큰 재목이다”라고 평가했다. 강 부회장은 “이 대회 우승자들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사례가 많기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지는 효과도 크다”라고 말했다.

대회 기간 클럽하우스에서 1번 홀 티잉 구역으로 내려가는 길에 역대 우승자의 사진이 걸린 배너를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2005년 우승자인 신지애부터 배너를 걸어 놓았는데 2006년 김세영, 2012년 김효주, 2013년 고진영 등 도쿄올림픽 여자 골프 경기에 출전하는 4명의 국가대표 가운데 세 명이 이 대회 우승 경력을 갖고 있다. 다른 한 명의 국가대표인 박인비는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골프 유학을 떠나 출전 기회가 없었다.

김세영은 세화여중 2학년 때인 2006년 역대 최연소 챔피언 기록인 만 13세 5개월 9일의 나이로 우승했다. 당시 김세영은 이보미, 유소연 등과 우승 경쟁을 펼친 끝에 연장전에서 장수화를 꺾었다.

고교 시절부터 프로급 기량을 보이며 ‘골프 천재’로 불리던 김효주가 2012년 대회에서 우승하자, 동갑내기 친구인 고진영이 2013년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이들은 나란히 세계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김효주는 후배들을 위해 2014년부터 매년 이 대회에 1000만원씩 장학금을 내고 있다.

이들 외에도 원재숙, 서아람, 정일미, 한희원, 장정, 이미나, 지은희, 신지애, 백규정, 최혜진, 유해란 등 한국 여자골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모두 이 대회 우승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 2006년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 김세영. / 2. 2012년 우승자 김효주(가운데)와 강은모(왼쪽) 유성컨트리클럽 대표, 고(故) 강민구 유성컨트리클럽 명예회장. / 3. 2013년 우승자 고진영(왼쪽)과 강형모 대한골프협회 부회장. 사진 대한골프협회 / 4. 아마추어 국가 대표 황유민(오른쪽)이 7월 2일 강민구배 제45회 한국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 대회에서 54홀 최저타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강형모 대한골프협회 부회장이 시상했다. 사진 민학수 기자
1. 2006년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 김세영.
2. 2012년 우승자 김효주(가운데)와 강은모(왼쪽) 유성컨트리클럽 대표, 고(故) 강민구 유성컨트리클럽 명예회장.
3. 2013년 우승자 고진영(왼쪽)과 강형모 대한골프협회 부회장. 사진 대한골프협회
4. 아마추어 국가 대표 황유민(오른쪽)이 7월 2일 강민구배 제45회 한국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 대회에서 54홀 최저타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강형모 대한골프협회 부회장이 시상했다. 사진 민학수 기자

체력, 코스 공략 기량 키우기 위해 ‘노 캐디, 노 카트’

해외에서도 통하는 세계 정상급 선수를 배출하겠다는 목표 아래 다양한 실험도 한다. 2016년 대회에선 1 대 1 매치플레이 방식을 도입했었고, 2019년 대회에선 ‘노(No) 캐디, 노(No) 카트’ 방식을 도입해 대회를 치렀다. 체력이 강조되는 현대 골프의 흐름과 선수들의 코스 공략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다. 국내 아마추어 대회는 골프장 소속의 하우스캐디 1명이 배정되고, 선수들은 카트를 타고 이동한다. 외국의 주요 대회에서는 선수들이 직접 카트를 끌고 다니며 캐디 없이 스스로 경기를 운영하는 게 기본이다.

끌고 다니는 카트에도 가격과 기능에 큰 차이가 있어 형평성 문제로 ‘노 캐디, 노 카트’ 방식이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효과적인 운영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무료 훈련한 박세리, 감사비 세워

유성컨트리클럽이 배출한 가장 큰 스타는 박세리(44)다. 유성컨트리클럽을 만든 고(故) 강민구 명예회장은 유성초등학교에 다니던 박세리에게 “집 앞마당처럼 생각하고 언제든지 와서 놀아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꿈을 키운 박세리는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맨발의 기적’을 선보이며 이에 보답했다.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슈퍼 땅콩’ 장정 등 이 지역 유망주들이 박세리와 같은 혜택을 보았다.

유성컨트리클럽은 박세리와 장정을 배출한 이후에도 아마추어 국가 대표 등에게 전지훈련 장소를 제공하면서 신지애, 김효주, 고진영 등이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소중하게 키우듯 어린 골프 유망주들을 살뜰히 보살핀 정성은 한국 골프가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박세리는 유성컨트리클럽 퍼팅 연습장 옆에 고마움을 전하는 감사비를 만들고 이런 글을 남겼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골프장을 찾던 어린 시절, 막연히 세계 정상을 꿈꾸며 골프채를 잡던 나에게 유성컨트리클럽은 언제나 포근한 어머니의 품 같았습니다.”

민학수 조선일보 스포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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