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포레의 ‘로망스’는 센강에 떠다니는 배와 부드러운 바람 같은 멜로디를 지녔다. 사진 위키피디아
가브리엘 포레의 ‘로망스’는 센강에 떠다니는 배와 부드러운 바람 같은 멜로디를 지녔다. 사진 위키피디아

최근 며칠간 비가 꽤 많이 내렸다. 여름 장마에 들어선 건지 하늘에서 구멍이 난 듯 물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다음 날 밤새 귓가를 적시던 빗소리는 잠잠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커튼 사이로 밝은 햇빛이 필자에게 상큼한 아침 인사를 건넨다. 맑은 날씨가 그간 꽤 그리웠던지라 일어나자마자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비가 갠 다음 날 아침은 무엇보다 신선한 공기가 일품이다. 먼지 하나 없고 전날 내린 빗방울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는 아침 공기가 내뿜는 향기는 영혼도 맑게 정화해 주는 듯하다. 가로수 사이를 거닐 때마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빛을 바라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무의식중에 불러본 멜로디인데 부드러운 아침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이 멜로디를 작곡한 이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그의 이름은 가브리엘 포레, 작품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작품번호 28번’이다.

며칠 뒤 열릴 콘서트에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오랜 친구와 함께 이 포레의 ‘로망스’를 연주하기 위해 연습하고 있다. 센강에 유유히 떠다니는 배 그리고 강변에서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과 같이 로망스의 멜로디는 상냥하고 살갑고 또 우아하기 그지없다. 친구와 나는 동의했다. 이 로망스는 프렌치 감성이 듬뿍 담긴 선율이라고.

가브리엘 포레는 사실 다소 생소한 작곡가일 수도 있겠다. 1845년 프랑스 남부 파미에르에서 태어났는데, 이 당시 파리에는 쇼팽,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 기라성 같은 거장들이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웃 나라 독일에는 슈만과 멘델스존 등이 있었다. 또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독일에 브람스, 바그너가 있었고 프랑스에는 드뷔시, 라벨 같은 이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애매하다는 표현이 적합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대중이 사랑하는 거장들의 활동 시기 사이에 포레가 애매하게 자리한지라 어쩌면 그들 명성의 어깨에 가려져 그도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의 이름이 비교적 적게 알려진 것 아닌가 추측해본다.

하지만 포레가 살아 있었을 때는 프랑스의 정신을 잘 녹여낸 음악으로 국민 영웅으로도 추앙받았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 1845년에 태어나 1924년 사망할 때까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탓에 낭만주의의 유산을 발전시켜 다음 음악 시대사 조인 인상주의가 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카미유 생상스 밑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이후에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의 작곡 교사로, 교장으로 재직하며 모리스 라벨, 레날도 안, 나디아 불랑제 등등 새 음악의 시대를 열게 될 제자들을 길러냈다고도 한다. 따라서 제리 더빈스와 같은 많은 음악 평론가들은 포레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브람스로 대표되는 독일 낭만주의와 드뷔시로 대표되는 프랑스 인상주의를 가교한 것을 꼽는다.

그의 작품을 들어보면 쇼팽의 작품이 연상되는 듯하면서 한편으로는 드뷔시가 연상되는 모호한 화성이 섞여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독창적인 언어일 수도 있겠다. 이러한 독창적 언어로 그는 프렌치 멜로디의 대가라는 평을 받을 만큼 수많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작곡했다. 그의 이름을 몰라도 ‘Sicilienne’ ‘Après un rêve’ 와 같은 작품은 드라마, 영화, 광고 음악으로도 제법 자주 사용됐기에 이 멜로디를 들으면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친숙함도 느껴질 거라 짐작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그의 음악적인 매력은 산능선이 끝없이 너울거리는 듯한 길고 유려한 선율이다.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순수한 멜랑콜리, 열정적인 사랑과 더불어 프렌치 특유의 부드러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가브리엘 포레의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가브리엘 포레의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프랑스는 필자가 사는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는 있지만, 국민성, 언어,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다르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독일은 상대의 제안을 거절하거나 본인의 생각을 표현할 때 주저 없이 ‘아니다(Nein)’라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에 본인의 의견을 다소 에둘러 표현하는 편이다. 독일어는 단어의 끝에 자음이 많이 들어가 경우에 따라 거칠게 느껴질 수 있으나, 프랑스어는 특유의 콧소리와 자음과 모음을 부드럽게 연결해 어디 끊어진 곳 없이 유연하게 들리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이 음악적인 표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도 안 되는 두 나라의 음악을 들어보면 인간의 마음을 위한 음악의 본질은 같음에도 그 표현 방식이 조금씩 달라서 참으로 흥미롭다. 그래서 그런지 포레의 멜로디는 마치 프랑스 언어의 운율처럼 어디서 끊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필자에게는 이국적이면서도 인상적인 멜로디다.

독자에게도 포레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및 그의 작품을 들어보라 권해본다. 그의 음악을 통해 부드러운 바람에 담겨 있는 사랑의 추억이, 여름 하늘의 밝은 햇살에 담긴 삶의 기쁨이 가슴으로 전달되길 바란다.


▒ 안종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가브리엘 포레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작품번호 28’
바이올린 연주 피에르 아모얄
피아노 연주 파스칼 로제

이번 연주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친구가 필자에게 먼저 포레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작품번호 28’을 제안했다.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널리 연주되지 않는 것에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필자도 실제로 이 작품을 공부하며 포레의 예술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기에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이 음반에는 로망스 말고도 포레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및 자장가 등이 수록 돼 있다. 바이올린의 피에르 아모얄과 피아노의 파스칼 로제 이렇게 두 프랑스 연주자의 음반으로 소개해 본다.


가브리엘 포레
‘하프를 위한 즉흥곡 작품 번호 86’
하프 연주 마리사 노블레스

하프를 위한 즉흥곡은 포레의 숨겨진 또 다른 보석이라 할 수 있다. 포레의 풍부한 화성과 빈번한 전조가 반음계의 표현을 위해 7개의 페달을 움직여야 하는 하프의 페달 테크닉의 난도를 극적으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하프를 위한 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명곡 중 하나로 손꼽히는 덕에 하피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곡이기도 하다. 마리사 노블레스의 연주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