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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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먼 길을 가는 사람’은 ‘허무한 속도’로 나아간다. 차갑고 쓸쓸한 이 고독한 존재는 실상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가는 건 허무의 방향이 아니니까.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삶을 다만 여행할 뿐인 사람에겐 여행이 주는 경이도 무의미해 보인다. 그의 이름은 시마무라다. 시마무라는 서양의 춤에 대한 글을 쓰지만 본질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부박한 리듬으로 삶을 탕진하는 한량에 더 가깝다. 내내 자기 삶의 외부자로 살아온 인간이 자기 안에 타인이라는 중력을 받아들이며 무게를 얻어 가는 과정. 나는 이 소설을, 내일 죽어도 좋을 어느 허무한 삶에 드리운 그림자라고 읽는다. “왜 뒤돌아보지 않았어요?” 기다리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삶에 그림자가 지는 일이다. 어둠이라는 깊이가 생기는 일이다.

‘설국’을 읽은 사람이라면 열에 아홉은 첫 문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머지 한 명도 말하지 않을 뿐 그 문장을 떠올리지 않은 건 아닐 것이다. 카뮈의 ‘이방인’과 함께 야스나리의 ‘설국’은 인간이 그은 문명의 역사를 일시에 지워 버리는 백지의 문장이니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눈 덮인 밤 풍경을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고 표현하는 이 문장의 효과는 다분히 ‘시적’이다. 눈 내린 밤이라는 자연적 상황을 바닥이라는 인위적 공간과 하얘졌다는 대립적 색채, 즉 이중의 역설을 통해 작가가 세운 것은 ‘눈 내린 밤’이라는 날씨나 시간이 아니라 이전의 세계와 구분되는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눈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선포. 이곳의 빛은 바닥에서 출발한다는 전언. 그러나 시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들로 쌓아 올린 소설이라 해서 ‘설국’이 이미지 자체에 기대고 있는 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 ‘설국’이 세운 건 입구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울과 거울이 맞닿으며 발생한 각도로 세상에 없는 공간을 만들어 낸 심연의 건축물은 이 세계의 질서가 아닌 다른 세계의 질서를 가시화한 허무의 집이다.

밤의 밑바닥을 가리키며 시작한 ‘설국’은 하늘의 은하수를 쳐다보며 끝난다. 눈 내린 길은 길을 잊은 길이지만 은하수는 상상된 길이다. 눈 내린 길은 망각의 길이지만 은하수는 미래의 길이다. 애초에 없고 지금도 없는 길. 현실을 차단하자 처음 보인 건 눈 내린 길이고 마지막에 보인 건 있었던 적 없는 길이다. 눈길을 고마코라 부르고 은하수를 요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마코와 요코는 인물을 넘어 하나의 상징이다. ‘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로 바라보면 시마무라 역시 그렇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라는 게이샤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오는 기차에서 요코라는 또 다른 여인을 만나는데, 고마코와 요코는 같은 남자를 보호하고 보살폈던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이이기도 하다.

고마코는 한때 그 남자의 약혼녀였고 요코는 그 남자의 새 연인이다. 고마코는 그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자신의 어떤 것은 결코 그에게 주지 않는다. 아직 어린 요코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자신의 무엇을 앗아가는지 모른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향한 마음과 더불어 요코에게도 아름다울 만큼 슬픈 매력을 느낀다.

시마무라가 ‘덧없음’에 이끌려 다니는 사람이라면 고마코는 ‘덧없는 헛수고’를 하는 사람이다. 일기를 쓰고 악기를 연습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위해 마음을 쓴다. 시마무라가 보기에 고마코의 헛수고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삶에 자신을 내어 줘도 삶이 그에게 주는 건 없거나 초라할 것이다. 더욱이 요코는 헛수고라는 인식도 없이 수고로운 삶을 받아들인다. 일하게 될 동생을 애절하게 부탁하고 자신이 돌보게 될 남자를 진심으로 간호한다. 허무한 속도로 방황하며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한 시마무라가 삶에서 가장 멀리 있는 존재라면 덧없는 헛수고를 통해서라도 자기 삶을 살려 하는 고마코는 좀 더 가까이에 있다. 다른 이들의 삶 여기저기에 포함되어 있는 요코는 삶 속에 있다 할 것이다. 이들이 무엇으로부터 멀리 있고 무엇에 가까이 있는 것인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세 사람이 허무의 다른 속도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사랑하지만 영원히 함께할 수 없고 마음을 다해 돌보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선로 끝에 묘지가 있는 것’처럼 인간의 끝에는 무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길이라는 수평적 세계에서 은하수라는 수직적 세계로 전환될 때, 인간은 권태로운 길 위를 떠다니는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 그리움으로 가라앉는 슬픈 존재가 된다.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것 같다고 할 때 시마무라가 느낀 것은 죽음을 포함하는 희망이다. 무겁고 새로운 희망이다. 죽음을 안고 있는 고마코처럼 시마무라는 은하수가 자기 안으로 흘러들고 있음을 느낀다. 끝없이 먼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다른 속도로 가는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 자기 안에 타인이라는 다른 중력이 있을 때 은하수처럼 춤추는 길이 생긴다. 뒤돌아보는 건 사랑의 방향이다. 끝은 마지막에 도착하는 선이 아니라 뒤돌아볼 때마다 떠오르는 점이며, 수많은 점이 모여 슬프고 아름다운 마지막이 이루어진다. 녹아 없어질 눈의 나라만이 알고 있는 덧없는 진실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Plus Point

가와바타 야스나리

189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1924년 잡지 ‘문예시대’를 창간해 신감각파의 유력한 일원이 되었다. 사춘기의 연정을 서정적으로 그린 소설 ‘이즈의 무희’ 등으로 이름을 알린 후 ‘금수’ 등의 문제작을 발표했으며 1935년에서 1947년에 이르는 기간에 ‘설국’을 발표하며 지금 형태의 ‘설국’을 완성해 나갔다. 비현실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미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설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대표작이자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며 ‘센바즈루’ ‘고도’ 등 전후의 작품과 함께 1968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격변하는 쇼와 시대에서 갖가지 전위적인 실험을 거듭한 끝에 전통적인 일본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기만의 감성(感性)을 닦아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근대 일본 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했다고 인식된다. 1972년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