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3장의 슬라이드가 담긴 교육용 아카이브’ 표지. 사진 김진영
‘2863장의 슬라이드가 담긴 교육용 아카이브’ 표지. 사진 김진영

파리에 갈 때마다 사진집을 보기 위해 자주 가는 서점이 있다. 그날도 사진집 코너에서 책을 보고 있었는데 한 아저씨도 책을 고르고 있었다. 곁눈질로 그가 고른 책들을 살펴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책을 고를 줄 아는 분이군.’

내가 말을 먼저 건넸는지 그가 말을 먼저 건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사진을 오랫동안 가르치다 은퇴한 교사라고 했다. 집에 사진집이 많다며 구경 오라는 그의 말에 약속을 잡고 놀러 갔다. 그의 말대로 수많은 사진집이 있었다. 나에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보여준 사진 슬라이드 필름들이었다.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기 전, 강의실에서 사진을 보여주는 주된 방식은 환등기에 슬라이드 필름을 꽂아 영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했던 수많은 슬라이드 필름을 보관하고 있었다. 어떤 사진은 그가 직접 찍은 것이기도 했다. 가르치는 내용에 맞는 이미지가 없을 때, 그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 교육 자료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은 주로 하늘이나 별의 움직임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는 큰 환등기는 모두 처분하고, 구소련 시절 제작된 작은 환등기를 여러 대 가지고 있었는데, 작은 환등기 1대와 슬라이드 필름 꾸러미 하나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 필름들이 무얼 가르치기 위한 것들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사진들을 토대로 사진집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와 헤어졌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와의 짧은 만남이 다시 떠오른 건 ‘2863장의 슬라이드가 담긴 교육용 아카이브(An Educational Archive of 2863 Slides)’라는 제목의 보고서였다. 내가 어렴풋이 그렸던 바로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수업에서 사용하기 위한 교육적 목적의 슬라이드 필름 2863장이 담긴 이 책은 네덜란드의 예술사학자 프리도 트루스트(Frido Troost, 1960~ 2013)가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게릿 리트벨트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ie)에서 수십 년간 예술사를 가르치는 데 사용한 슬라이드 필름을 담은 책이다.

페이지마다 격자 디자인 속에 담긴 이미지로 가득한 이 책에는 프리도 트루스트의 말은 한마디도 적혀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처음에 독자에게 혼란을 준다. 강의록 일부라도 수록되어 있다면, 그가 직접 이 슬라이드 필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했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겠지만, 책에는 그저 도판 자료만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가 남긴 이미지 자료만으로 그가 가르치고자 했던 내용을 과연 짐작할 수 있을까?

우선 이 책을 통해 그가 폭넓은 관점으로 예술사를 가르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담배 광고, 화장품 광고 등 광고 사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부터 낸 골딘까지 중요한 예술가의 대표 작품들, 프랑스의 신경정신과 의사 장 마르탱 샤르코가 히스테리 발작을 시각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찍은 환자의 사진, 인간과 동물의 연속 동작을 분절 촬영해 움직임의 순간을 담아낸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의 사진, 희귀 질병을 기록한 의학 사진, 사람이 죽은 후 촬영한 사후 사진 등 책에 수록된 도판의 종류는 그야말로 방대하다.

사진사를 서술하는 많은 책, 그리고 사진사를 가르치는 많은 수업은 대체로 예술 사진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 사진 발명 이후 오늘날까지 만들어진 수많은 사진 가운데 실제로 예술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일부임에도 예술사조와 예술가의 이름을 중심으로 써 내려간 좁은 사진의 역사에는 미처 담기지 못한 풍성한 관점들이 프리도 트루스트의 수업에는 담겨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각예술 시도들이 담긴 슬라이드가 있는 페이지. 사진 김진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각예술 시도들이 담긴 슬라이드가 있는 페이지. 사진 김진영

캡션도 없이 제시된 이미지를 따라가고 양옆, 위아래를 살피고, 앞 페이지와 뒤 페이지를 들춰가며 책을 보다 보면, 이 과정에서 어느 순간 이 사진들이 무작위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테마를 중심으로 프리도 트루스트가 가한 일종의 ‘편집’이 들어가 있는 사진 컬렉션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페이지에는 19세기 후반 인간의 영혼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대상을 사진으로 포착하고자 했던 심령 사진, 느린 셔터 스피드로 촬영함으로써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을 마치 유령처럼 보이게 하여 희미하고 분열된 자화상을 남긴 작가 프란체스카 우드만의 사진, 타히티섬에서 원시적 영혼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폴 고갱의 회화가 이어진다. 그는 짐작건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다양한 시각예술의 시도를 이 슬라이드들을 보여주며 가르쳤을 것이다.

또 다른 페이지에는 부활한 예수가 하늘에 떠 있고 이를 바라보는 지상의 사람들이 그려진 르네상스 회화, 새의 날개와 같은 것을 몸에 부착해 하늘을 날고자 한 사람들의 모습, 다양한 형태의 열기구들, 피터팬이나 배트맨과 같이 하늘을 나는 대중문화 캐릭터들의 이미지가 전개된다. 이 이미지들을 보여주며, 그는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고자 한 인간의 욕망을 역사적으로 되짚어보고, 이를 실제로 가능하게 한 첨단기술들을 설명하며, 이것이 시각예술에 어떠한 방식으로 반영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았을까?

물론 텍스트가 없기에 어떤 것을 가르치려고 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이미지들도 있다. 또한 특정 주제에 비교적 많은 슬라이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가르치는 프리도 트루스트 본인의 관심사가 교육 내용에 반영되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비평가이자 교육자인 데이비드 캠패니(David Campany)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가르치는 일은 객관적일 수 없다. 가장 매력적인 선생은 자신이 흥미를 느낀 것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고, 그들은 이 자료들이 익숙한 역사, 주요 자료, 기존의 교육과정, 그리고 그들이 매혹된 것 사이를 가로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트루스트의 아카이브 역시 익숙한 예술사와 사진사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아카이브는 그가 특정한 주제와 모티브에 더 집중했다는 점도 보여준다.”

자신의 관심사를 토대로 학생들에게 보여줄 이미지를 선정하고 순서를 정한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이 책은 그가 지향했던 교육관을 어렴풋이 그려보게 한다. 그는 하나의 이미지, 혹은 한 작가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배경과 시대의 이미지를 연결하여 사고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가르치고자 했을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아는 것은 지식으로 끝나지만, 서로 다른 이미지를 해석하는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학생들은 바라보는 방식, 표현하는 방식을 배워 나갔을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시각예술 교육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마치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시험 같다. 수많은 이미지를 통과하며 그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미들은 끝없이 열려 있고 어떤 답을 쓰더라도 틀렸다고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시험 말이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