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바웃 어 보이’는 무위도식하며 인생을 소비하는 서른여덟 살의 싱글 남자와 보살핌이 필요한 열한 살 소년의 이야기를 다뤘다. 사진 IMDB
영화 ‘어바웃 어 보이’는 무위도식하며 인생을 소비하는 서른여덟 살의 싱글 남자와 보살핌이 필요한 열한 살 소년의 이야기를 다뤘다. 사진 IMDB

인간은 섬인가? 생명이라는 바닷속 깊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만 저 홀로 떠 있다는 착각에 빠지면 인간은 외로운 섬이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는 무위도식하며 인생을 소비하던 서른여덟 살의 싱글 남자와 보살핌이 필요한 열한 살 소년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사람은 섬이다. 그러나 섬과 섬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윌은 직업을 가져본 적도, 가정을 꾸려본 적도 없다. 사람은 모두 섬이며 자신이야말로 그런 존재 중에서 꽤 멋진 섬이라고 믿는다. 타인과 섞여 살아야 할 필요도, 성가시게 부딪힐 일도 없다. 남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세상과 얽혀 싫은 소리도 듣고 눈치도 봐야 하지만 윌은 작곡가였던 아버지의 저작권 덕에 일하지 않고도 풍족한 삶을 누린다. 연애도 길어야 두 달이면 싫증이 나는 윌의 인생엔 절박한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다. 사람들은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만, 혼자인 것만큼 여유 있고 자유로운 삶도 없다. 친구들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젖병과 기저귀로 잔뜩 어질러진 거실에서 행복한 듯 미소 지으며 “너도 결혼해야지, 이렇게 귀여운 아기를 갖고 싶지 않니?”라고 물으면 ‘내가 미쳤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섬과 섬은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인데 왜들 하나로 뭉쳐 살지 못해 저리 안달일까?

그러던 어느 날, 윌은 아이가 딸린 여자를 만나는 게 편하다는 걸 알게 된다. 여자가 자기에게만 매달리지 않고 적당히 놀다 헤어져도 원망하지 않는다. ‘아이가 있으니 네가 그러는 거 이해한다’며 오히려 미안해한다. 윌은 뻔뻔하게도 아이를 혼자 기르는 이혼남인 척, 싱글 부모 모임에 들어가 연애 상대를 물색한다.

마음에 드는 여자의 호감을 사고 함께 공원에 가기로 한 날, 그녀의 아기 말고도 큰 혹이 하나 더 딸려 나온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엄마 대신 그녀의 친구에게 떠맡겨진 휴일이 유쾌할 리 없는 마커스도 내내 시큰둥하다. 싱글맘과 오붓하게 즐기려던 계획이 무너지고 겨우 소풍을 끝낸 윌은 귀찮은 혹을 떼어내듯 마커스를 집에 데려다준다. 그리고 뜻밖의 사건을 만난다.

이혼한 엄마와 단둘이 사는 마커스는 언제나 걱정이 한 보따리다.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마커스의 엄마 피오나는 우울증 환자다. 아이는 종종 울먹이는 그녀를 보며 자신이 엄마의 마음을 다 채워줄 수 없다는 좌절감에, 혹시 엄마가 자기를 남겨두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런 걱정이 현실로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모두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섬들뿐인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엄마가 자살하려고 약을 먹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마커스는 비명을 지른다. 다행히 피오나는 목숨을 건졌지만, 아이는 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공포의 무게를 더는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마커스는 엄마를 위해서, 또 자신을 위해서 가족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윌을 떠올린다. 아이의 바람대로 엄마와 윌이 결혼하고 세 사람이 한식구가 되면 좋으련만, 마커스가 생각해도 피오나는 도무지 윌의 스타일이 아니다. 대신 마커스는 학교가 끝나고 매일 윌의 집에 찾아온다. 혼자 있는 게 편하기만 했던 윌의 고요한 세계에 마커스가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다가온 것이다. 처음엔 귀찮게만 생각했던 윌은 마커스가 학교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서야 아이가 차마 털어놓지 못한 속내를 들여다보게 된다.

외딴 섬으로 사는 걸 자발적으로 선택했고 그것을 즐겼던 윌과 달리 마커스는 한 번도 바란 적 없으나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외톨이일 수밖에 없는 작은 섬이었다. 아이는 수업시간에도 문득 엄마가 혹시 쓰러져 있는 건 아닐까, 두렵다. 집에 돌아가 현관문을 열고 엄마가 무사한 걸 확인할 때까지 온종일 긴장하고 있다. 마커스는 그런 불안을 윌에게 맡겨놓고 보통의 아이처럼 어른에게 보호받는 기분을 잠시나마 느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윌은 아이를 데리고 나가 새 운동화를 사준다. 점원에게 마커스의 아빠로 오해받고는 ‘내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 싶으면서도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에 뿌듯하다. 윌은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인생을 돌아본다. 크리스마스 캐럴 한 곡을 히트시킨 후 후속곡을 내지 못해 괴로워했던 아버지. 음악을 하고 싶었던 윌은 아버지만큼도 성공하지 못할까 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를 고집하는 이유도 상처받기 싫어서 미루고 외면하고 도망쳤던 것일지도.

언제부턴가 윌은 마커스를 기다린다. 혼자 있는 것도 좋지만 녀석과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집 안에 자기 목소리 말고, 다른 사람이 내는 소리를 듣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윌은 처음으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도 타인을 마음에 들이는 기쁨을 느낀다.

꼭 감고 있던 눈을 뜨면 온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윌은 마커스를 받아들이면서 타인을 품는다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제 윌은 마커스의 집에도 놀러 가고 자신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도 연다. 혼자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하고 왁자하게 웃는 시간은 한결 따뜻하고 행복하다.

2002년에 나온 영화다. 윌을 연기한 휴 그랜트 특유의 유머와 니콜라스 홀트의 아역 시절 연기가 잔잔한 코미디 영화를 한결 품위 있게 해준다.

17세기의 영국 시인 존 던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라는 구절이 포함된 시에서 ‘인간은 섬이 아니다, 누구나 대륙의 일부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영화는 ‘사람은 섬이다, 다만 바다 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섬이다. 저마다 독립적이고 독보적인 섬, 저 홀로 떠 있는 것 같지만 대륙의 일부임을 자각하는 섬, 타인과 나 사이에 배를 띄울 줄 아는 섬이다. 다리를 놓기도 한다. 배는 우정일 수도, 연애일 수도, 결혼일 수도 있다. 다리가 놓여 있긴 해도 자식과 부모 역시 따로따로 섬이다. 멀리 있는 듯 보이지만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섬,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섬들이 있어서 당당히 홀로 설 수 있는 섬. 사람은 섬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