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저자가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몰입하면서 심리적 해방감을 만끽한다. 사진 셔터스톡
우리는 저자가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몰입하면서 심리적 해방감을 만끽한다. 사진 셔터스톡

1986년인지 1987년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그해 여름방학에 나는 일본 도쿄에 일주일가량 머물고 있었다. 일본 외무성과 한국의 교육부(당시 문교부)가 공동 주최하는 한·일 대학생 문화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실시한 일본 방문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주로 도쿄와 교토를 돌아보면서 일본의 문화를 체험했다.

그중에도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도쿄 시내 진보초(神保町)역 근처에 있었던 대형서점 산세이도(三省堂)와 그 주변의 고서점 거리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도 종각역 주변에 종로서적이 있었고, 광화문에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이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처음 본 산세이도는 경상도 깡촌에서 올라와 막 서울 생활을 시작한 더벅머리 대학생을 압도했다.

산세이도가 모두 몇 층이었는지도 생각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교보문고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면적에, 서점의 각층을 에스컬레이터가 연결하고 있었던 것은 또렷이 기억한다. 1980년대 서울에서 에스컬레이터 있는 건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또한 산세이도 주변에 자리한 엄청난 규모의 고서점 거리도 볼 만했다.

지금 산세이도와 진보초 고서점 거리를 다시 보면 그렇지 않겠지만, 그때 진보초 거리의 초대형서점과 분야별로 특화된 수천 개의 고서점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제국의 문화적인 아우라’에 기가 죽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 제국주의는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구나!’ 물론 이는 제국주의라는 체제의 윤리적 정당성 문제와 별개로 하는 소리다.

세월이 흘러 2021년 8월, 나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파월서점(Powell City of Books)을 방문하게 되었다. 사실 파월서점의 존재를 사전에 알고 간 것은 아니었다. 여행을 함께 갔던 아들과 딸이 내가 책을 좋아하고 서점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여행 코스에 파월서점을 넣었던 것이다. 일단 파월서점 본점은 거리의 한 블록을 고스란히 자신들의 건물로만 채우고 있었다.

미국의 일간지 USA투데이는 파월서점을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서점 중 하나로 꼽았고, CNN도 ‘세계에서 가장 멋진 서점 중 하나’로 평가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71년에 설립된 파월서점은 서점을 9가지 색으로 구분하고 3500개 이상의 섹션으로 나누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파월서점은 400만 권 이상의 책을 보유하고 있는데, 매달 수천 권씩의 중고서적을 사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파월서점은 한국의 교보문고와 알라딘 중고서점을 합쳐 놓은 형태다. 자신들이 ‘세계 최대 규모의 독립서점’이라는 자부심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 같았다.

기존의 대형서점이나 브랜드 서점은 새로 나온 책들을 빠른 속도로 유통하면서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독립서점들은 거대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수익 창출 자체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히 독자 입장에서 독자에게 필요한 책을 신간뿐만 아니라 중고책이나 절판된 책까지 함께 공급한다는 장점이 있다.

파월서점에 여러 날 머물면서 서점 전체를 둘러보고 싶었지만, 일정상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관심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한나절 이상 둘러보고 책을 사기로 했다. 특별히 좋았던 것은 서양미술사나 인류학적 상징에 관한 책 중에서 지금은 절판돼 구하기 힘든 책을 다수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큰 판형에 올컬러로 된 책이라 비쌀 수밖에 없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20권가량을 구입했는데, 총가격은 우리 돈으로 20만원을 넘지 않았다. 요즘 젊은이들은 가치 있는 물건을 수중에 넣었을 때 ‘득템’했다고 하는데, 나야말로 파월서점에서 크게 득템한 셈이었다.

오디오북이니 전자책이니 하면서 여러 가지 형식의 책이 나오면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대개 종이책보다 싸고, 종이를 절약할 수 있고, 책을 구입하는 시간은 물론 책을 유통하거나 보관할 공간까지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종이책에 대한 우리의 아주 오랜 기억들, 우리 인류의 뇌 한구석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 기억들이 하루아침에 망각의 강을 건너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독립서점인 미국 파월서점. 사진 파월서점
세계 최대 규모의 독립서점인 미국 파월서점. 사진 파월서점

‘디지털 문화에 대한 피로감’이 아날로그적인 종이책을 계속 찾게 하고 서점을 찾게 만든다는 분석은 과연 사실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가 급속히 디지털 사회로 접어들면서 종이책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종이책의 종류와 발행 부수가 오히려 늘었으면 늘었지 줄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종이책을 찾고, 서점을 찾아가는 것일까. 사람들은 책에서 나오는 냄새를 좋아한다. 인쇄되어 나온 책에서 풍기는 냄새는 왠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나는 아주 오래된 고서의 퀴퀴한 냄새까지도 좋아한다. 신간이든 구간이든 서점에 가서 책의 향기를 맡으면서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순간, 우리는 일상에서 탈출하여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서점의 문지방을 넘어 멈춤의 세계로 들어가라!” 스페인의 한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 책장에서 책장까지 천천히 걸어가면서 시간이 정지된 느낌을 즐기라고 한다. 상상력이 우리의 손끝에 가하는 모든 것을 음미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결코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자가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몰입하면서 심리적 해방감을 만끽한다. 그 순간 우리는 학업, 회의, 가사, 전화 등 일상적 스트레스에서 온전히 자유롭다. 저자의 스토리텔링 속도는 오직 우리가 책장을 넘기는 속도에 달려 있다. 그런 해방감을 경험하고 난 뒤에 다시 돌아온 일상은 이전의 일상과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서점에서 길을 잃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자칫 목숨까지 잃을지 모르지만 서점에서, 책 속에서 길을 잃으면 우리는 온전한 마음의 안식과 재충전을 경험한다. 책 속에서, 서점에서 길을 잃었다가 돌아온 사람에게서 나오는 기운과 향기를 선인들은 서권기 문자향(書券氣 文字香)이라고 했다.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는 뜻이다.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 향기는 천 리를 가고, 사람 향기는 만 리를 간다(花香百里, 酒香千里, 人香萬里)’라는 말이 있다. 이때의 사람의 향기가 바로 서권기 문자향이 아닐까. 우리나라에도 대형서점이 더 많아지고, 파월서점 같은 큰 독립서점도 생기고, 골목골목 크고 작은 독립서점들이 즐비하여 책의 향기, 사람의 향기가 가득했으면 좋겠다.


▒ 김진국
문화평론가, 고려대 인문예술과정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