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목살에 말벡을 곁들여 마셨을 때의 그 환상적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몇 해 전 요맘때였다. 친구와 함께 와인 한 병을 들고 찾아간 연탄구이집은 돼지고기를 덩어리째 구워 가위로 숭덩숭덩 썰어주는 곳이었다. 지글지글 익은 돼지고기의 고소한 육즙과 아르헨티나산 말벡의 진한 과일 향은 최고의 마리아주(marriage·음식과 와인의 조화)였다. 그날 이후로 바람이 차가워질 때면 말벡의 포근한 맛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신다.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맛이 붉게 물든 단풍을 닮았다.
말벡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적포도다. 전 세계 말벡의 75%가 아르헨티나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이 품종이 원래 프랑스 태생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프랑스산 원조 말벡은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다. 말벡은 어쩌다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스타덤에 오르게 된 것일까?
말벡의 고향은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카오르(Cahors)라는 지역이다. 그곳에서 말벡은 2세기부터 재배됐고 이후 보르도까지 퍼져 주품종의 자리에도 올랐다. 특유의 검붉은 루비빛 때문에 ‘검은 와인’이라 불리던 말벡은 한때 유럽 귀족들이 가장 선호하는 레드 와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자연환경은 말벡과 잘 맞지 않았다. 대서양에서 밀려드는 습기 때문에 말벡은 늘 곰팡이성 질병에 시달렸다. 급기야 19세기 말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무시무시한 병충해가 포도밭을 초토화하자 보르도에서는 병든 말벡을 뽑고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심었다. 결국 프랑스에서 말벡은 카오르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한편 아르헨티나의 와인 역사는 스페인이 이곳을 식민지로 삼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사 때마다 와인을 곁들이는 스페인 사람에게 와인은 필수품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들이 고급 와인을 생산한 것은 아니었다. 기후와 토양이 낯설다 보니 우선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이 많은 품종을 재배할 수밖에 없었다. 품질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가 고급 와인에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약 300년이 지난 19세기 중반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자 유럽 각국에서 많은 사람이 아르헨티나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출신 이민자들은 아르헨티나 와인 산업의 주축이 됐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안데스산맥 기슭에 있는 멘도사(Mendoza)였다. 이곳은 고도가 높아 일조량이 풍부하고 극도로 건조하지만 부족한 강수량을 안데스산맥의 눈 녹은 물로 채울 수 있어 포도를 기르기에 적합했다.
1868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와인의 고급화를 위해 프랑스에서 포도를 들여왔다. 여기에 말벡이 포함돼 있었는데, 따뜻하고 건조한 멘도사는 말벡에 천국이었다. 프랑스산 말벡은 질감이 거칠어 오래 숙성시켜야 마실 만했지만, 햇볕을 듬뿍 받고 자란 아르헨티나산 말벡은 묵히지 않아도 부드럽고 묵직한 맛이 일품이었다. 말벡은 와인 농가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20세기 중반에는 포도나무 다섯 그루 중 한 그루가 말벡일 정도로 아르헨티나의 대표 품종으로 자리를 잡았다.
말벡의 고급화를 이끈 카테나 자파타 와이너리
말벡이 도입됐어도 아르헨티나 와인이 바로 고급화가 된 것은 아니었다. 아르헨티나 와인은 여전히 국내 시장에 의존하며 벌크와인 생산에 머물러 있었다. 말벡을 세계 시장에 우뚝 세운 데는 카테나 자파타(Catena Zapata)의 역할이 컸다. 와이너리 설립자인 니콜라 카테나는 1898년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였다. 그는 멘도사에 밭을 일구고 말벡을 심었다. 그의 아들 도밍고도 대를 이어 와인을 만들었지만, 20세기 중반 아르헨티나의 불안한 정치는 경제 발전의 큰 걸림돌이었고 와인 사업도 순탄치 못했다.
도밍고의 아들 니콜라스는 경제학자였다. 1980년대에 미국 버클리대에서 초빙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나파밸리를 자주 방문했다. 당시엔 어느 나라도 프랑스에 도전장을 내밀 수준이 아니었지만 나파밸리만은 예외였다. 나파밸리 와인의 뛰어난 품질을 몸소 체험한 니콜라스는 귀국한 뒤 교수직을 떠나 와인 사업에 매진했다. 그는 저급 와인 생산을 과감히 중단하고 고급 와인에만 집중했다. 그런 그를 보고 다들 미쳤다고 비난했지만, 그는 심지어 수출까지 단행했다.
니콜라스는 학자답게 과학적인 연구를 토대로 와인 품질을 끌어올렸다. 그는 남들이 관심도 두지 않던 안데스산맥 고지대에 새로 밭을 일궜다. 가장 높은 밭의 고도가 해발 1500m에 이를 정도였다. 모두들 그런 곳에서는 포도가 익을 수 없다고 했지만 니콜라스의 예측이 옳았다. 높을수록 기온은 낮아지지만 햇볕이 강렬해져 맛이 더 월등한 포도가 생산되는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안데스산맥 고지대는 멘도사에서도 최고의 산지로 꼽히며 너도나도 앞다퉈 포도나무를 심는 곳이 됐다.
와인에 대한 학구열은 이제 니콜라스의 딸 라우라가 이어가고 있다. 스탠퍼드대 의학박사 출신인 그녀는 의사의 길을 가는 대신 카테나와인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녀는 연구팀을 이끌며 토양과 품종 등 와인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하고 결과를 널리 공유함으로써 아르헨티나 와인의 고급화를 선도하고 있다.
카테나 자파타의 와인은 말벡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알라모스(Alamos) 말벡은 편하게 즐길 수 있는 2만원대의 데일리 와인으로 과일 향이 풍부하고 맛이 부드러워 다양한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린다. 4만원대의 카테나 말벡은 가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향이 진하고 맛의 균형이 뛰어나다. 카테나 알타(Alta) 말벡은 해발 900~1500m에 위치한 밭 다섯 군데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각기 다른 고도에서 자란 말벡의 다채로운 풍미가 교향곡처럼 한데 어우러져 아름답고 정교한 맛을 뽐낸다. 가격은 10만원대다.
말벡의 섬세한 면을 느끼고 싶다면 포르투나 테라에(Fortuna Terrae)를 추천한다. 카테나의 밭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아드리아나 밭의 포도로 만든 이 와인은 신선한 과일 향에 꽃 향이 어울려 향긋하기 그지없다. 말벡 아르젠티노(Argentino)는 카테나를 대표하는 아이콘급 와인이다. 수령 90년이 넘은 고목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이 와인은 응축된 풍미와 포근한 보디감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야생 베리의 달콤함이 오래 맴돈다. 숙성 잠재력도 탁월하다.
최근 맛본 2009년산은 진한 과일 향과 초콜릿, 커피, 담배 등 복합미가 우아함의 진수를 보여줬다. 셀러에 고이 보관했다 특별한 날 열기에 적합한 와인이다. 포르투나 테라에와 말벡 아르젠티노 모두 20만원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