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秦始皇陵)의 예에서 보듯이 고대 중국의 황릉 건설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장기 국가사업으로 막대한 예산이 소요됐다. 전한 후기 이 건설사업을 주관하면서 거액을 횡령한 전연년은 결국 비리가 폭로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은 한 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의 무릉(茂陵). 사진 바이두
진시황릉(秦始皇陵)의 예에서 보듯이 고대 중국의 황릉 건설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장기 국가사업으로 막대한 예산이 소요됐다. 전한 후기 이 건설사업을 주관하면서 거액을 횡령한 전연년은 결국 비리가 폭로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은 한 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의 무릉(茂陵). 사진 바이두

전한(前漢) 후기 전연년(田延年)이란 대신이 칼로 목을 베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거액을 부당하게 착복한 혐의로 수사를 받던 도중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권신 곽광(霍光)의 심복으로, 곽광을 도와 옹립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재무장관에 해당하는 대사농(大司農)이란 요직에 있었던 그는 정권 창출의 공로와 최고 권력자라는 든든한 배경을 믿고 부정 축재에 거리낌이 없었다. 직전의 소제(昭帝)가 21세에 요절하자 거대한 황릉 건설을 위해 장기간에 걸쳐 엄청난 물자와 인력이 소요되는 과정에서다. 특히 대량의 토석(土石)을 운반하는 데 투입될 3만 대의 우마차를 민간으로부터 징발하면서 대표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그는 3000만 전의 비용을 조정에 6000만 전으로 보고, 국고에서 3000만 전이나 횡령했다. 대규모 관민 합동 건설사업을 주관하면서 몰래 거액을 챙긴 것이다.

이는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민간에 골고루 돌아갈 이득을 한 권력 있는 탐관오리가 가로챈 전형적인 부패범죄다. 그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했지만, 두 명의 거상(巨商)이 그의 비리를 조정에 제보했다. 앞서 이 두 사람은 젊은 황제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정보를 사전에 탐지, 국상에 사용될 각종 물자를 대량 매입했다. 매점매석이었다. 황제가 사망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전연년은 조정에 보고하고, 두 사람이 확보해 놓은 물자를 전량 몰수했다. 막대한 손실을 당한 두 사람은 복수를 위해 거금으로 사람들을 고용, 계속 전연년의 뒷조사를 했다. 그 결과 마침내 결정적인 비리가 포착됐다.


‘정관지치’의 주역인 당 태종과 그에게 직언하는 대주. 사법을 관장하던 대주는 공평한 법 집행을 위해 절대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 있게 처신함으로써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사진 바이두
‘정관지치’의 주역인 당 태종과 그에게 직언하는 대주. 사법을 관장하던 대주는 공평한 법 집행을 위해 절대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 있게 처신함으로써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사진 바이두

심복 전연년의 극심한 독직 사건으로 입장이 난처해진 곽광이 그를 불러 진상을 캐물었으나,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뗐다. 사실대로 고백하면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구제해 줄 요량이었지만, 자신조차 속이려는 심복의 태도에 배신감을 느낀 곽광은 감찰 당국에 실상 조사를 지시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전연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최근 드러난 이른바 ‘화천대유(火天大有)’라는 희대의 비리 사건과 유사한 면이 적지 않다. 이러한 비리는 절도나 강도 사건처럼 소수에게 피해를 주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 광범위한 손실을 끼칠 뿐 아니라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공익에 막대한 위해를 가한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음은 물론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소수의 부패 행위가 국가 안보까지 위태롭게 하고 급기야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전국시대 말기 조(趙)의 총신(寵臣) 곽개(郭開)는 뇌물로 당대 최고의 두 명장을 해치고 나라를 멸망케 한 원흉으로 꼽힌다. 그 희생자는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이다. 진(秦)의 침공으로 나라가 위기에 직면하자 조왕은 정쟁으로 타국에 망명해 있던 염파를 불러오려고 사신을 보냈다. 곽개는 그 사신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어 염파를 모함하도록 사주했다. 사신은 노년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정정한 염파의 모습을 보고 와서도 왕에게는 그가 너무 늙어 장수로서 역할을 할 수 없겠다고 보고했다. 이로 인해 귀국의 염원이 좌절된 염파는 한동안 이국을 전전하다 울분으로 객사했다. 그 뒤 이목이 조의 대군을 이끌고 진의 공격에 잘 대응하였다. 이에 진이 다시 곽개에게 뇌물을 보내어 이목의 병권을 박탈하도록 유도했다. 곽개는 왕에게 대군을 거느린 이목이 모반을 꾀한다고 모함해 결국 이목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한 부패 관료가 뇌물로 국가의 두 동량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로써 조의 대군은 궤멸하고 도성이 함락되면서 왕은 포로가 된 끝에 나라는 처참하게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뇌물과 관련해 자주 언급되는 고사가 ‘사지(四知)’이다. ‘후한서(後漢書)’의 ‘양진열전(楊震列傳)’에 나온다. 당대의 명사 양진이 태수 부임 도중 한 지방에 머물자, 그곳 현령 왕밀(王密)이 밤중에 찾아와 금덩어리를 내밀었다. 과거 자신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오른 지인의 행동에 양진이 “옛 친구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어찌 옛 친구를 모르나?” 하고 물었다. 왕밀이 대답했다. “늦은 밤이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양진이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天知, 神知, 我知, 子知),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가?” 하고 꾸짖자, 왕밀이 부끄러워 황금을 가지고 물러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이 오늘날에는 별로 효험을 보이지 못한다. 특히 ‘하늘’과 ‘신’을 들먹이면 크게 웃을 사람이 많다. 이에 그들이 웃지 못하도록 등장하는 것이 ‘현대판 사지’이다. 바로 은행 계좌, CCTV, 휴대전화 및 컴퓨터 파일, 그리고 피해자나 관련자 제보다.

문제는 이와 같이 확실한 증거의 현대판 사지도 무용지물일 때가 적지 않다는 데 있다. 비리 혐의자에 대한 수사와 기소, 심판의 권한이 전적으로 사법 당국에 주어져 있으며, 그들에 대한 감시 및 제어 장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권력자의 지시를 받거나 보신을 위해 그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로 인해 일반 대중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저들의 행위에 분노를 금치 못할 때가 적지 않다. 첨단 문명과 인지(人智)의 수준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데, 아직도 ‘유전무죄’니 ‘유권무죄’니 하는 서글픈 말들이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이(所以)다.

당 태종(唐太宗)과 신하들의 문답 및 언행을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의 ‘공평을 논함(論公平)’ 편에 이런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어느 날, 이부상서(吏部尙書) 장손무기(長孫無忌)가 황제의 부름으로 입궐하면서 무심코 칼을 찬 채 들어갔다. 뒤늦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 대신이 “궐문 수위 무관을 사형에 처하고, 장손무기에게는 징역 2년에 동 20근의 벌금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종이 그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하자, 사법을 관장하는 대주(戴冑)가 “두 사람이 일시적 실수로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는데 어찌 처벌이 현격히 다를 수 있나”라고 반대했다. 당시 장손무기는 황후의 오빠로서 그 신분과 권세가 일개 무관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런데도 대주는 “법이란 국가가 온 세상에 크나큰 신의를 펼치는 방도(法者, 國家所以布大信乎天下)”라고 역설하면서 공평한 법 집행을 강조, 논박을 그치지 않았다. 무관의 죄가 사형에 해당하면 장손무기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에 태종도 자신의 명을 거두어들임으로써 무관은 사형을 면했다. 7세기 전반의 20여 년 동안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대가 펼쳐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이 권력에 굴하지 않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직언을 하는 신하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영명한 군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1400년 전 다른 나라의 옛일이 차라리 더 민주적이고 진보적이어서 부럽기까지 하다. 권력자와 사법 당국의 사법 농단에 대한 단죄는 과연 언제까지 하늘과 신에게 맡겨두어야 하는가?


▒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