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아리’란 애칭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인 호주의 그레그 노먼이 사우디아라비아 자본과 손잡고 미 PGA투어 체제 흔들기에 나섰다. 노먼은 엄청난 상금을 내건 프리미어골프리그를 통해 27년 전 좌절된 월드골프투어(WGT) 구상을 이번엔 성공시키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사진 AP연합
‘백상아리’란 애칭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인 호주의 그레그 노먼이 사우디아라비아 자본과 손잡고 미 PGA투어 체제 흔들기에 나섰다. 노먼은 엄청난 상금을 내건 프리미어골프리그를 통해 27년 전 좌절된 월드골프투어(WGT) 구상을 이번엔 성공시키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사진 AP연합

거침없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일달러가 세계 골프계에 플랫폼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사우디아라비아 자본이 막대한 상금을 내걸고 타이거 우즈와 필 미컬슨 등 유명 스타 선수들을 중심으로 미국 PGA투어에 대항하는 프리미어골프리그(PGL) 또는 슈퍼골프리그(SGL)를 창설한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는데, 첫 번째 구체적 행동이 이뤄졌다. PGA투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 골프 질서의 가장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아시안투어가 그 타깃이었다.


아시안투어에 2억달러 투자

10월 30일 아시안투어는 보도자료를 통해 “호주의 그레그 노먼이 대표를 맡은 LIV 골프 인베스트먼트가 2억달러(약 2388억원)를 투자해 앞으로 10년간 대회 10개를 새로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아시안투어의 신설 대회들은 중동을 비롯한 아시아와 유럽 지역에서 열리며, 2022시즌 아시안투어 대회는 25개가 열릴 계획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3월 이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투어 일정이 중단된 아시안투어로서는 돈벼락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다.

전 세계에서 88승(PGA투어 20승 포함)을 거둔 레전드 노먼은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투자를 계속할 것”이라는 선동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여기서 두 가지 궁금증을 확인하고 넘어가자. 코로나19로 존폐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영향력이 줄고 있던 세계 골프의 변방 아시안투어에 이런 ‘묻지 마 투자’가 이뤄진 배경은 무엇일까. ‘화이트 샤크(백상아리)’란 애칭으로 골프의 한 시대를 풍미한 노먼은 왜 이런 반주류 움직임의 주연 인물로 등장한 것일까.

아시안투어에 투자를 주도하는 LIV 골프 인베스트먼트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가 대주주인 회사다. PIF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은 최근 잉글랜드 프로축구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3억500만파운드(약 4892억원)에 인수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일달러는 골프계에 얼굴을 내밀자마자 강펀치를 날렸다. 2019년 출범한 골프 대회 사우디 인터내셔널은 유러피언투어가 주관하는 대회인데 세계 톱 랭커들을 엄청난 초청료를 주고 불러와 같은 기간 열리는 PGA투어 대회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세계 1위였던 더스틴 존슨(미국)이 두 차례(2019·2021년) 우승했고, 2010년 US오픈 우승자인 그레이엄 맥도웰(영국)이 한 차례(2020년) 정상에 올랐다. PGA투어는 올해 7월 이 대회에 소속 선수 출전 금지령을 내렸다. 유러피언투어는 “내년부터 주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PGA투어의 움직임에 공조했다.

PGA투어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인권 운동을 펼치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살해한 것을 세계 골프 스타들이 출전하는 스포츠 이벤트로 희석한다는 ‘스포츠 워싱’을 명분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이 대회를 기점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자본이 PGA투어를 위협하는 프리미어골프리그(PGL)를 추진한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앞으로 유러피언투어가 빠진 사우디 인터내셔널 골프 대회를 아시안투어가 내년부터 10년간 주관한다.

‘백상아리’ 노먼이 PGA투어 체제에 반기를 든 혁명 세력의 얼굴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27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1994년 11월 세계 랭킹 1위는 호주 출신의 멋쟁이 골퍼 노먼이었다. 노먼은 카우보이모자처럼 양옆이 말려 올라간 커다란 밀짚모자를 썼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스타일이었다. 기량도 출중했다. 엄청난 파워와 레이저처럼 정확한 아이언샷이 트레이드마크였다. 구름 갤러리를 몰고 다녔다. 그는 ‘재주는 스타 선수들이 부리고, 돈은 PGA투어나 유러피언투어가 번다’고 생각했다. 여러 사업체를 일구는 등 비즈니스 감각도 뛰어난 그는 월드골프투어(WGT)란 기치 아래 세계 톱 랭커 30~40명이 출전하는 8개의 챔피언십 대회를 구상했다.

호주 출신 미디어 재벌인 머독이 운영하는 폭스 네트워크가 독점 중계권료로 1억1200만달러(1337억원)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노먼이 시도한 혁명은 불발탄으로 끝났다. 새로운 투어가 성공하기 위해선 스타 선수들이 필요했다. 우즈나 미컬슨 같은 미국 선수들은 물론이고 노먼이 공을 들였던 스페인의 세베 바예스테로스와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 남아공의 어니 엘스도 동조하지 않았다. 화들짝 놀란 PGA투어는 발빠르게 대응했다. 새로운 투어에 가입하려는 선수들에겐 ‘미국 PGA투어 출장 정지’란 엄포를 놓고 노먼의 아이디어를 흡수해 새로운 골프 시리즈를 만들었다. PGA투어와 유러피언투어,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아시안투어, 남아공선샤인투어, 호주 PGA 등 6개 단체가 공동 주관하는 월드골프챔피언십(WGC) 시리즈를 1년에 네 차례 연 것이다. 2000년 출범한 WGC는 메이저대회보다 더 많은 상금을 걸고 세계 톱스타들이 빠짐없이 참가하도록 세계 랭킹순으로 출전 자격을 주었다.

그랬던 노먼이 이번엔 사우디 자본과 손잡고 PGA투어에 다시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6월 9일 ‘프리미어골프리그(PGL)’는 인터넷 홈페이지와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투어 운영 계획을 발표하며 움직임을 공식화했다.

2023년 1월 출범을 공식 선언한 프리미어골프리그는 남자 골퍼 톱스타 48명만 출전하는 대회로 8개월간 18개 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그중 12개 대회는 미국에서, 나머지 6개 대회는 아시아와 유럽에서 연다는 계획이다. 48명만 참가하는 대회인데도 총상금 2000만달러(약 238억8000만원)를 내걸었다. 우승자는 400만달러(약 47억7600만원), 최하위도 15만달러(약 1억7910만원)를 받게 된다. 올해 마스터스 우승 상금 207만달러(약 24억7158만원)의 두 배 가까운 액수다.

개인전 외에 골프에서 아주 독특한 포맷인 단체전을 함께하는 방법으로 열린다. 자동차 경주대회인 포뮬러1(F1) 형식의 팀 경쟁 포맷을 참고했다. 개인전을 치르면서 네 명이 한 팀으로 전 세계를 돌며 투어를 한다. 팀 캡틴은 리그 오너십도 받게 된다. 이들은 메이저 대회나 미국과 유럽의 골프 대항전인 라이더컵 일정과는 충돌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PGA투어는 상당수 대회 일정이 겹치게 돼, 자칫 2부 투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될 수 있다.

프리미어골프리그는 올해 초 미컬슨, 더스틴 존슨, 브라이슨 디섐보, 브룩스 켑카, 리키 파울러, 저스틴 로즈 등 PGA투어의 특급 스타들에게 각각 1억달러(약 1194억원)에서 수천만달러의 거액을 제안하며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PGA투어의 제이 모나한 커미셔너는 결사항전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새로운 당근을 제시했다. “프리미어골프리그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 영구 징계를 하겠다”는 강력한 경고와 함께 “올해부터 ‘플레이어 임팩트 프로그램’을 통한 새로운 보너스 제도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플레이어 임팩트 프로그램’은 4000만달러(약 477억6000만원)를 성적순이 아닌 팬들의 인기를 기준으로 선수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선수들 반응은 갈라진다. PGA투어 선수협의회 대표를 맡는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는 “프리미어골프리그는 돈을 많이 벌 수 있겠지만 역사와 전통이 있는 PGA투어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경쟁하기를 원한다. 지금의 자리에서, 메이저 대회에서 더 많이 우승하고 싶다”고 반대 입장을 내놓았다. 많은 선수가 이런 입장이다.

프리미어골프리그 추진 세력과 함께 라운드를 하는 등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미컬슨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일이다. 새로운 투어가 우리에게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고 스포츠 전체에 큰 이익을 줄 수 있겠으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고 애매하게 말했다. 프리미어골프리그 측이 사활을 걸고 매달리는 우즈는 올해 2월 교통사고 이후 재활 중인 상태로 아직 공식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다.

노먼을 얼굴로 내건 사우디아라비아 자본과 PGA투어의 골프 플랫폼 전쟁이 어떤 결말을 낳을지 전 세계 골프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