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무크의 사진집 ‘발코니’ 표지(왼쪽)와 내용. 오르한 파무크는 한 장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다. 사진 김진영
오르한 파무크의 사진집 ‘발코니’ 표지(왼쪽)와 내용. 오르한 파무크는 한 장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다. 사진 김진영

집이나 건물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어떤 장면을 주시하거나 사진을 찍어본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희한하게도 자유롭게 세상을 걸을 때보다 실내에 갇혀 자신을 정박시킨 채 무언가를 바라볼 때 세상에 대한 명상이 더 많이 떠오르곤 한다.

터키 이스탄불 태생 소설가로 200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오르한 파무크(Orhan Pamuk)는 집 발코니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스탄불의 지한기르 모스크의 바로 뒤에 있던 그의 아파트 발코니에서는 광대한 파노라마를 볼 수 있었다. 매일 소설을 쓰기 위해 서재 책상에 앉아 있다가, 이따금씩 발코니로 나가면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 혼 항구 입구, 그곳을 드나드는 배들, 구시가지 정경, 멀리 보이는 언덕과 산, 동쪽을 향해 있는 섬이 펼쳐졌다.

소설가인 그가 발코니에서 바라본 세상을 사진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이 잘 풀리지 않을 때였다. 그는 쓰고 있던 소설이 만족스럽지 않아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감정을 허구의 세계인 소설이 아니라 발코니에서 바라본 현실의 세계를 통해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사진을 찍었지만, 한 번도 최신 카메라를 산 적이 없던 그는 2012년 뉴욕의 유명한 카메라숍인 B&H에 들러 DSLR카메라와 망원렌즈 그리고 삼각대를 사서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수많은 기능이 있고 그가 느끼기에 어떤 면에서는 과하게 재능 있는 카메라 앞에서 그가 생각한 건 그저 기록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담아낼 수 있는 장면을 찾아 기록하는 것.

그는 계속 사진을 찍었다. 글쓰기를 멈추는 순간엔 발코니에 서서 삼각대에 설치해둔 카메라로 밖을 바라봤다. 2012년 겨울부터 2013년까지 그렇게 총 8500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발코니(Balkon, 2019)’는 그 가운데 568점을 수록한 책이다. ‘Balkon’이라는 제목은 터키어로 발코니를 의미한다.

책은 ‘Balkon’이라는 제목의 12쪽 분량의 에세이로 시작된다. 이 에세이는 바스커빌(Baskerville) 폰트로 수록되어 있다. 고전적이고 우아하면서 가독성 높은 폰트로, 문학에서 본문용 서체로 많이 쓰이는 글자체다. 짐작건대 작가는 이 글자체를 두 가지 이유로 선택했을 것이다. 작가인 오르한 파무크가 자신의 첫 사진집에 수록된 자신의 글을 편안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 독자들이 소설가로서의 그와 사진가로서의 그를 모두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말이다.

에세이가 끝나면 사진이 시작된다. 그가 포착한 광경은 ‘와’ 하는 감탄이 나올 법한 결정적이거나 특별한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배가 나타났다 저 멀리 수평선을 향해 사라진다. 배 주변으로 난 물거품의 흔적으로 배의 방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갈매기가 지붕에 앉아 있다. 온종일 화물선과 여객선이 오가고 해가 뜨고 진다. 이는 발코니에서 볼 수 있는 매일 거의 똑같게 반복되는 장면일 것이다.


오르한 파무크의 사진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배가 약간 더 움직이거나, 빛이 살짝 바뀌는 식이다. 사진 김진영
오르한 파무크의 사진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배가 약간 더 움직이거나, 빛이 살짝 바뀌는 식이다. 사진 김진영
오르한 파무크의 사진집 ‘발코니’에 담긴 12쪽 분량의 에세이. 사진 김진영
오르한 파무크의 사진집 ‘발코니’에 담긴 12쪽 분량의 에세이. 사진 김진영

오르한 파무크는 사진을 찍으며 처음에는 ‘나는 왜 사진을 찍을까?’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점차 이 질문은 구체적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저 멀리 항해하는 홀로 있는 배를 왜 찍을까?’ 이론적으로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사진 찍는 경험을 하면서, 나는 이를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광경에는 내 마음 상태를 반영하는 무언가가 있고, 내 저변에 흐르는 형언할 수 없지만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무언가가 있다.” 화려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순간을 담는 것은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가 쫓은 것은 자신의 감정을 대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세상에서 발견하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특별한 사건 없는 이 사진들을 지루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사진집에서는 오히려 만나기 어려운 예기치 못한 감각을 일깨워준다. 바로 시간의 연속성과 그 시간을 채우고 있는 무수히 많은 세상의 특별할 것 없는 존재들이다.

보통 많은 사진집은 작가가 포착한 단일한 순간을 영예롭게 보여 주고자 한다. 한 사진이 포착된 앞뒤의 맥락을 보여주는 일은 좀처럼 없고 이른바 B 컷도 특별한 이유 없이는 공개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발코니’는 한 장면을 멀리서 찍은 것과 조금 더 줌을 해서 찍은 것을 같이 보여주거나 찍는 각도를 조금 바꾼 사진 여러 장을 함께 수록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이 컷과 컷 사이에는 카메라를 든 오르한 파무크만 어떤 행동을 바꾼 것이 아니다. 컷과 컷 사이, 바로 그 시간만큼 배가 약간 더 움직였고, 갈매기는 조금 더 날아갔으며, 구름 사이로 햇빛이 더 스며들었다.

이를 전달하기 위해 ‘발코니’는 한 쪽에 한두 장의 사진을 수록하는 방식이 아니라, 많게는 한 쪽에 8장을 수록하는 방식을 택했다. 독자는 사진 한 장 한 장을 따로 보기보다 자연스레 여러 장을 묶어서 보게 된다. 단일한 사진을 ‘보는’ 사진집이라기보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읽는’ 유형의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좋은 사진’ 혹은 ‘좋은 사진집’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조금은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해외 사이트에서 이 책에 대한 독자의 낮은 평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기꺼이 이 책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선 책으로 출간하기에는 사진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의견이 있었다. 동시대를 지배하는 스펙터클함과 고해상도 이미지의 관점에서 보면 사진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망원렌즈를 사용해 일부 사진은 CCTV 화면을 연상시킬 정도의 화질을 보여준다. 그가 원본 데이터 촬영(RAW)을 했다거나 뛰어난 보정 과정을 거치는 등 고해상도에 신경 썼을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사진의 기술적 퀄리티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시선이다. 기술적 완성도와 화려함 속에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텅 비어 있다고 느껴지는 사진보다 기술적 완성도는 조금 낮을지 모르나 말하려는 바가 분명히 느껴지는 작업은 계속해서 보게 된다.

또 다른 평점 가운데는 사진집에 장소에 대한 소개와 같은 캡션이 전혀 없어 아쉽다는 의견이 있었다. 우리는 많은 사진집에서 제목이나 장소를 표기하는 관습에 익숙해져 있다. 사진을 보고 텍스트 정보를 확인하면, 사진을 ‘잘 본 느낌’이 든다. 하지만 ‘발코니’는 그러한 익숙한 길 대신, 색과 소재를 중심으로 사진을 정렬하고 독자가 의미를 읽어내 주길 기다리며 침묵하는 사진들이 담겨 있다. 집중해서 사진을 읽다 보면, 특별할 것 없는 대상들이 조그맣게 말하고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