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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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설명충’이라는 말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설명’을 구분해 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설명은 물에 녹지만 어떤 설명은 물에 녹지 않는다. 그 설명이 물에 녹는지 아닌지 알려면 일단은 그 설명을 물에 넣어 봐야 한다. 물을 듣는 사람이라고 해 보자. 물에 녹는 설명이란 듣는 사람에게 흡수되는 설명이다. 물에 녹지 않는 설명이란 듣는 사람에게 전혀 흡수되지 않는 설명이다. 설명충이란 듣는 사람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 설명을 일삼는 사람에 대한 멸칭이다.

우리 모두 자신은 설명충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대부분도 그럴 것이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대화 상대에 따라 말하기의 주도권은 바뀌므로 누구에게나 설명충은 잠복해 있다. 자신이 당사자가 된다면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저 알고 있는 것을 공유한다는 의도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 이 악의 없는 행동이 조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말이다.

그럼에도 설명충이라는 말로 인해 얻게 되는 공적 이익은 있다. 자신의 설명에 대한 긍정적 검열을 통해 대화에서 흔히 발생하는 독과점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으므로 설명할 사람은 계속 설명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설명충이란 말의 실질적 기능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전혀 교환되지 않고 있는 말의 현장, 즉 대화의 상태를 지칭할 수 있는 효율적 표현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교환되지 않는 대표적인 말이 ‘설명’이다. 설명은 사실을 전달하는 말이지만, 사람들은 사실에 별로 관심이 없다.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해야 할 말이고 알아야 할 말이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해야 할 말이고 알아야 할 말이라면 이미 그는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설명이 나에게도 중요한 만큼 타인에게도 중요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름지기 설명은 하는 사람만큼 듣는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리어왕의 죄는 사랑에 값을 매긴 죄

‘리어왕’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드거는 해야 할 말 따위 넣어두고 느끼는 걸 말하라고 일갈한다. 나는 이 말이,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 같지도 않은 리어왕이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핵심이자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가 필요 이상으로 비참하게 끝나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해야 할 말을 한다는 건 계산된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느낀 것을 말한다는 건 계산할 수 없음에도 말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계산하다 망한다.

‘리어왕’의 비극은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아버지가 세 딸에게 재산을 물려줄 근거로 자신을 향한 사랑을 말해 달라고 요구한 데에서 시작된다. 화려한 말로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설명하는 두 딸과 달리 막내딸인 코델리어는 아버지에게 흡족한 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딸 된 도리로서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모든 다른 사랑을 압도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사랑일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말을 듣고 노한 아버지와 딸의 대화는 인상적이다. “그렇게 어린데도 그렇게 무정하냐.” “이렇게 어린데도, 전하, 진실하옵니다.” 코델리어는 무정한 진실의 편에 선 대가로 아무런 재산도 얻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은 물론 리어왕의 마음에서도 추방당한다.

그러나 이 비극의 정점은 리어왕의 최후에 있다. 두 딸에게 재산을 나눠 주면 딸들이 자신을 정성으로 돌봐 줄 거라는 기대는 배신당한다. 리어왕은 가차 없이 버려져 오갈 데 없는 부랑자가 된다. 부와 권위를 나눠 준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고, 두 딸이 사랑을 고백한 아버지는 오직 나누어 줄 권위와 부가 있는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이토록 가혹한 벌을 받게 된 리어왕의 죄명은 뭘까.

두 딸은 해야 할 말을 했다. 그 말은 계산된 말이었다. 한편 리어왕은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계산된 말을 시켰다. 리어왕의 죄는 사랑에 값을 매긴 죄다. 그런데 그 값은 애초에 측정할 방법이 없으므로 잘못된 대가를 지불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잘못된 대가를 지불하는 바람에 리어왕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다.

연인과 이별할 때, 회사를 그만둘 때, 친구와 절교할 때, 우리는 종종 해야 할 말 뒤에 숨는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해야 할 말은 예상 가능한 결과를 가져다준다. 예상 가능하다는 것은 불확실한 현대사회에서 추구해야 할 미덕이다. 코델리아처럼 해야 할 말이 아니라 느끼는 걸 말할 때 계산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계산할 수 없는 일을 선택하는 건 모험이다. 모험은 생활의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죽어 사라지는 이 통렬한 비극의 마지막을 장식할 대사로 셰익스피어는 무장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야 할 말이 아니라 느끼는 걸 말하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설명충이란 느끼는 걸 말하지 않는 태도에 붙여진 죄명인지도 모르겠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Plus Point

윌리엄 셰익스피어

1564년 잉글랜드 스트래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에서 비교적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의 런던에서 극작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1616년 고향에서 사망하기까지 37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희곡들은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는 ‘세계 문학의 고전’인 동시에 현대성이 풍부한 작품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크게 희극, 비극, 사극, 로맨스로 구분되는 그의 극작품은 인간의 수많은 감정을 총망라할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철학까지도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