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 다랭이 마을. 사진 최갑수
가천 다랭이 마을. 사진 최갑수
마늘밭의 농부들. 사진 최갑수
마늘밭의 농부들. 사진 최갑수

사천에서 창선·삼천포대교를 넘었다. 남해에는 이미 봄이 주둔해 있었다. 마늘밭은 초록으로 빛났고 햇살이 내려앉는 바다는 설탕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였다. 바다 건너편 산자락은 연두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남해 여행의 첫 목적지는 독일마을이다. 삼동면에 자리한 독일마을은 1960~70년대 독일로 떠난 광부와 간호사들이 은퇴 후 돌아와 정착한 마을이다. 우리나라가 빈곤하던 시절에 독일로 간 이들은 열심히 일해 월급을 대부분 송금했다. 이 돈은 형제자매와 부모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됐을 뿐만 아니라 전후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동력이 됐다. 영화 ‘국제시장’이 이들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다. 

독일마을에 들어서면 이국적인 분위기에 감탄한다. 흰 벽과 붉은 기와지붕이 눈에 띄는 독일식 건물 40여 채가 모여 그림 같다. 독일 교포들이 현지에서 가져온 건축자재로 전통적인 독일식 주택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 너머로 푸른 남해가 넘실거린다. 걷다 보면 정성스럽게 꾸민 정원이 여행객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독일마을의 장점은 다양한 독일 문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 독일식 소시지와 맥주, 빵 등 독일 음식 맛보기는 이곳을 찾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남해보물섬전망대. 사진 최갑수
남해보물섬전망대. 사진 최갑수

독일마을을 나와 물미해안도로를 따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는 이 길에 ‘핫’한 여행지로 떠오르는 곳이 있다. 스릴 만점의 스카이워크를 체험할 수 있는 남해보물섬전망대다. 스카이워크는 투명 강화 유리를 공중에 설치해 그 위를 걷게 만든 시설이다.

하니스를 착용하고 스카이워크에 오른다. 유리 바닥 아래로 절벽과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바다에는 흰 포말을 일으키며 파도가 치고 있다. 몸이 하늘과 바다 사이에 붕 떠 있는 기분이다. 바닥 폭은 1m가 채 되지 않는다. 유리가 부서지지 않을까, 줄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몸에 연결된 줄을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중간 지점에 강사 겸 안전 요원이 기다린다. 안내에 따라 로프에 의지한 채 바다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겁에 질린 여성 참가자가 소리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고, 친구들이 짓궂게 놀린다. 담력이 센 참가자는 발로 난간을 힘껏 밀어 바다 쪽으로 몸을 던진다. 보기만 해도 아찔하고 탄성이 터진다. 

즐겁고 아찔한 시간을 보내다 반 바퀴를 더 돌면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니스를 벗고 카페로 들어서면 남해 풍광이 눈에 들어오고, 밖에서 스카이워크를 체험하는 여행자들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바다다. 멀리서 달려와 갯바위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파도.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을 꿈도 못 꾸는 시절이지만, 그래도 국내에 외국 못지않게 아름다운 바다가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다.

물미해안도로를 계속 따라가면 상주면이다. 상주해수욕장을 지나면 금산. 금강산을 닮았다고 해 ‘소금강’이라고도 불린다. 높이 681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숱한 바위 절경과 빼어난 전망을 갖춘 명산이다. 본디 보광산이었으나, 이성계가 이 산에 와서 기도를 한 뒤 왕위에 오르자,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산 이름을 금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보리암 해수관음상. 사진 최갑수
보리암 해수관음상. 사진 최갑수

금산 보리암은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고찰로 우리나라 3대 기도 도량 중 하나다. 무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정성을 다해 기도해 보자. 부처님께서 들어주실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려 시대의 봉수대가 있는 정상에 오르면 동서남북의 산줄기와 바다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봄 남해를 걷다, 바래길

남해에는 ‘바래길’이라는 걷기 좋은 길이 만들어져 있어 우리는 남해를 걸으며 여행할 수 있다. 바래길은 남해군 10개 읍면을 모두 경유하는 걷기 길이다. 16개 본선 코스와 지선 코스 세 개가 있으며 총길이는 231㎞에 달한다. 본선 코스는 섬 전체를 연결하는 종주 길이며 지선 코스는 원점 회귀가 가능한 순환형 걷기 여행길이다.

모든 코스가 다 좋지만 봄에 가장 인기가 있는 코스는 4코스 ‘고사리밭길’이다. 창선면 복지센터에서 시작해 식포, 가인, 천포를 지나 적량마을에서 끝난다. 총길이는 15.4㎞다. 고사리 최대 산지인 창선면 가인리 일대 구릉 지대를 걷는 코스로 이국적인 풍경이 일품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구릉 지대에서 보았던 그 유려한 곡선의 풍광에 뒤지지 않는다. 

이런 풍경이 어떻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 고사리밭이 모두 사유지였기 때문이다.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됐는데, 남해군관광문화재단이 고사리 농가를 일일이 찾아가 허락을 받고서야 마침내 길을 열 수 있었다. 

고사리밭길은 낮고 높은 언덕을 따라 파도처럼 오르내린다. 걷기에 만만한 코스는 아니다. 그래도 멋진 풍경이 모든 수고를 덜어주고도 남는다. 숲을 지나고 산봉우리를 하나 넘자 고사리밭 넘어 다도해가 펼쳐진다. 멀리 우윳빛 해무에 휩싸여있는 바다. 길은 이제 서서히 내리막길이다. 까마득하게 마을 하나가 보인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고두마을이다. 고사리밭 길에는 간혹 트럭들이 다닌다. 곧 시작될 고사리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이다. 농약을 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자라는 게 고사리라지만, 그래도 어느 것 하나 사람 손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또 농사다. 이 넓은 구릉 지대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손으로 하나하나 일궈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풍경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 빚은 것, 그래서 더 감동적이고 더 아름답다. 

길은 적량마을에서 끝난다.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골목길 담장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공터마다 푸른 마늘이 자라고 있다. 골목을 빠져나오면 바다다. 어선들이 봄바람에 한가하게 흔들리고 있다.


▒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여행수첩

먹거리남해의 별미는 멸치 쌈밥이다. 남해 멸치는 다른 지역의 멸치보다 유달리 크고 살도 많다. 그래서 멸치를 찌개로도 만들어 먹는다. 커다란 멸치를 넣어 얼큰하게 끓여 낸 멸치 찌개는 밥 한 숟가락을 올리고 쌈 채소와 함께 싸서 먹는데 매콤달콤한 양념과 부드러운 식감이 어우러져 젓가락을 바쁘게 한다. 호원정이 유명하다. 남해시장에 자리한 짱구식당은 물메기탕을 잘하는 집. 싱싱한 제철 활어회도 맛볼 수 있다. 부산횟집과 남해물회의 물회도 유명하다.

미국 CNN이 선정한 그곳 금산을 나온 길은 금평에서 1024번 지방도를 타고 앵강만을 돌아간다. 해안 도로가 계속 이어진다. 굽이굽이 돌다 노도와 만난다. 서포 김만중이 유배를 갔던 곳이다. 초록의 마늘밭 위에는 바다의 푸른 빛깔이 떠 있고 그 위에는 연한 하늘빛이 펼쳐진다. 해안 도로를 계속 따라가면 다랭이마을에 닿는다.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꼭 가 봐야 할 곳 3위에 오른 곳. 산비탈 급경사에 층층이 들어선 120층의 마늘밭이 마치 거대한 설치 미술을 연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