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과 피노 누아. 사진 셔터스톡
봄꽃과 피노 누아. 사진 셔터스톡

입맛이 참 간사하다. 날이 추울 땐 시라(Syrah)나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처럼 묵직하고 진한 와인이 그렇게 맛있더니, 봄바람이 산들 불자 가볍고 향긋한 피노 누아(Pinot Noir)에 곧장 손이 간다. 피노 누아는 봄꽃을 닮았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작은 꽃처럼 풍미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 상위 50개 중 절반이 피노 누아다. 범접하기 힘든 우월함이다. 

피노 누아는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서 탄생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미 서기 1세기에 부르고뉴를 지배했던 로마인이 피노 누아 와인을 즐겼다고 하니, 양조용 포도 중에서도 역사가 상당히 긴 편이다. 피노 누아는 프랑스어로 검은 솔방울이라는 뜻이다. 포도송이가 솔방울 모양이고 그 안에 까만 포도알이 촘촘하게 달려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런 생김새 때문에 피노 누아는 기르기 까다로운 품종으로 악명이 높다. 곰팡이는 포도에 아주 무서운 질병인데, 피노 누아는 포도알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어 곰팡이에 매우 취약하다. 그렇다고 덥고 건조한 환경을 선호하는 것도 아니다. 포도 껍질이 얇아서 자외선과 열기에 약하고 날이 너무 가물면 과육의 수분이 빠져나가 포도가 쪼그라든다. 반대로 비가 많이 와도 곤란하다. 과육이 물을 머금어 커지면 껍질이 쉽게 찢어진다.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이상적인 기후에서만 재배가 가능해 피노 누아를 기를 수 있는 땅은 축복받은 곳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아이러니한 것은 피노 누아의 특장점도 얇은 껍질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피노 누아는 와인잔 바닥이 보일 정도로 루비 빛이 영롱하다. 포도 껍질이 얇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빛깔이다. 립스틱이나 넥타이를 고를 때 버건디 컬러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버건디는 부르고뉴의 영어식 표현, 즉 부르고뉴산 피노 누아 와인을 뜻한다. 와인 색이 얼마나 예쁘면 색깔 이름이 다 됐겠는가.

질감이 떫지 않고 매끈한 것도 피노 누아의 특징이다. 와인의 떫은맛은 포도 껍질 속 타닌 때문인데 피노 누아는 껍질이 얇아서 타닌이 적다. 한 모금 머금으면 비단결 같은 질감이 입안을 희롱한다. 거부하기 힘든 우아함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가격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기르기 까다롭고 생산량도 많지 않아 그럴 테지만 평균 가격이 다른 와인에 비해 꽤 높다. 그래도 좌절은 금물! 합리적인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좋은 피노 누아가 얼마든지 있다.


주요 산지별 피노 누아 고르기 꿀팁

프랑스 부르고뉴는 피노 누아의 고향이자 세계 최고의 피노 누아 산지다. 병당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로마네 콩티(Romanée-Conti)가 부르고뉴산 피노 누아 와인이다. 부르고뉴에서 생산되는 레드 와인은 대부분 피노 누아로 만든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레이블에 품종명을 적지 않는다. 대신 마을이나 밭 이름을 적는다. 테루아(terroir·포도가 생산된 토양과 부수적인 환경)가 와인의 맛과 향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낯선 지명들 때문에 우리는 부르고뉴 와인을 고를 때 소위 ‘멘붕’에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레이블 읽기가 의외로 어렵지 않다. 부르고뉴 와인은 지역, 마을, 밭 단위로 등급이 나뉜다. 지역 단위 와인이 기본 등급이고 마을 단위가 그다음, 밭 단위 와인이 최상급이다. 등급이 높을수록 와인이 묵직하고 풍미가 진하다. 그럼 어떻게 구분이 가능할까.

지역 단위 와인 레이블에는 부르고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것이 많다. 이런 와인은 풍미가 좀 약하지만 상큼하고 신선해 다양한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린다. 가격도 병당 5만원 선으로 부담이 없다. 마을 단위 와인은 레이블에 부르고뉴 대신 마을 이름만 적혀 있다. 

가격은 10만~20만원대로 높은 편이지만 마을별로 개성이 넘치고 향도 풍부하다. 추천할 만한 마을로는 본(Beaune), 제브레 샹베르탱(Gevrey-Chambertin), 뉘생조르주(Nuits-Saint-Georges), 본 로마네(Vosne-Romanée) 등이 있다.

밭 단위 와인은 부르고뉴 피노 누아의 백미다. 레이블에 밭 이름과 함께 그랑 크뤼(grand cru)나 프르미에 크뤼(premier cru)가 쓰여 있는데, 프르미에 크뤼보다 그랑 크뤼가 한 등급 위다. 로마네 콩티가 바로 동명의 그랑 크뤼 밭에서 생산된 와인이다. 모두 우수한 밭에서 생산된 최고급 와인이며 수백에서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지만 대체로 40만~50만원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쉽게 사 마실 수 있는 가격은 아니지만 향미의 화사함과 복합미가 워낙 뛰어나, 값어치는 충분하다. 대신 빈티지(vintage·포도를 수확한 해)로부터 10년은 숙성시켜야 맛이 절정에 오르므로 영 빈티지를 구입했다면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생년이나 결혼한 해처럼 의미 있는 빈티지를 구해 보관했다가 특별한 날 열기 좋은 와인이다.

최근에는 신대륙 피노 누아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의 오리건(Oregon)은 10~20년 전부터 부르고뉴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곳이다. 석회질 땅이 많은 부르고뉴와 달리 현무암, 사암, 황토에서 자란 오리건 피노 누아는 맛이 부르고뉴산과 사뭇 다르다. 크랜베리와 라즈베리 등 붉은 베리류 향이 가득하고 흙, 계피, 홍차, 바닐라 등의 풍미가 복합미를 장식한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가 화사하다면, 오리건산은 세련된 타입이다. 고가 와인도 꽤 많지만 5만~15만원 선에서 고른다면 오리건의 특징이 잘 살아 있는 피노 누아를 맛볼 수 있다.

뉴질랜드도 요즘 피노 누아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센트럴 오타고(Central Otago) 지역은 ‘남반구의 부르고뉴’로 불리며 테루아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곳이다. 이곳 와인은 질감이 탄탄하고 과일 향이 신선하며 허브 향이 경쾌하다. 아직 수입량이 많지 않으나 10만원 정도면 좋은 와인을 구입할 수 있다. 피노 누아 초심자에게는 가성비 좋은 칠레산을 추천할 만하다. 체리, 딸기, 크랜베리 등 달콤한 과일 향이 풍부하고 보디감이 부드러워 누구나 마시기 편한 스타일이다. 다양한 육류와도 궁합이 잘 맞는다. 최근에는 칠레산도 고급화하며 가격이 오르는 추세지만 아직은 5만원 선에서도 구입 가능한 좋은 와인이 많다. 어떤 와인을 살지 결정했다면 이제 가장 크고 불룩한 잔을 준비할 차례다. 그 잔에 피노 누아를 따르고 봄날의 향기를 만끽해 보자.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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