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사진 셔터스톡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사진 셔터스톡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둔 토요일 저녁, 대학 동기 A가 내게 전화를 했다. “왜 얼굴 한번 보자고?” “아니, 갑자기 페이스북을 보다가 짜증이 나서.” “소셜미디어(SNS)는 재미있게 즐겨야지, 왜 일희일비하고 그래?” 친구 A는 모 대학의 교수로 있는 지인 B의 글을 보다가 부아가 나서 전화를 한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A의 말이 무슨 뜻인지 즉각 알아들었다. 평소에 B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글쓰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B는 엄정한 중립성을 요구하는 자연과학자도 아니다. 현실적인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발언할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 분야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A의 분노와 짜증을 유발한 원인은 B가 평소 SNS나 언론에서 표출하는 글과 발언의 강도가 아니다. 말과 글의 품격이 문제였다. 나는 한바탕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야, B가 그런 줄 몰라서 그래. 하루 이틀도 아닌데 오늘 새삼스레 왜 그래.” “나도 알지만 B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가 지식인인지 시정잡배인지 당최 요량을 못 하겠어. 꼭 ‘지라시’를 읽는 것 같다니까.”

A의 말처럼 아무리 SNS가 개인 미디어라고는 해도 공개된 글의 경우 불특정 다수가 지켜본다. 하지만 B는 무슨 성명서나 대자보를 갖다 붙인 듯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구토물을 쏟아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창 중년을 통과하고 있는 B의 글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거칠다. 억지 춘향식의 논리 전개와 논리적 비약이 섞여 있는 경우도 다반사다. SNS가 아니라 언론에 발표된 글도 정도 차이일 뿐 매한가지다.

국내 유명 대학을 나와 미국의 아이비리그급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B. 나는 B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전공의 특성상 자칫 특정 성향인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면 필시 외눈박이처럼 비뚤어진 시각을 가지게 될 거야. 다양한 부류의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했으면 하네!” 그러나 그는 이미 외갈래 길을 걷고 있었고, 나의 우려는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됐다.

B 언행의 문제점을 한마디로 줄이면 ‘편 가르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확실하다면, 논조가 다소 강경하더라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주장의 근거가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혹은 이념적, 문화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집단의 유불리에 따라 달라진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아마도 B 자신은 자신의 말과 글이 매우 논리적이고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것이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융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있는지는 모른다.” 

융의 말처럼 우리는 B의 논리 전개에 무슨 오류가 있고, 그가 왜 저런 양태를 보이는지 직관적으로 안다. 하지만 B 자신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도리어 B는 자신의 말과 글에 과도한 자신감마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B의 이러한 이른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심리학 이론 중에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이론이 있다.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찾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외면하는 경향성이 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자기중심적 왜곡 조심해야

그런데 B의 경우에는 확증 편향을 넘어 ‘우리 편 편향(Myside bias)’을 보인다. 우리 편 편향은 ‘자기중심적인 왜곡’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사전에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태도에 따라 자료를 취사선택해 평가하거나 검증하려고 든다. 

얼핏 보면 우리 편 편향이나 확증 편향은 비슷해 보인다. 우리 편 편향은 자신이 사전에 가지고 있는 신념과 태도에 대한 확신이 확증 편향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확증 편향은 단순히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소극적인 편향이다.

우리 편 편향에 물든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태도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확신이 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스타노비치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그런 사람은 어떤 대상에 대해 ‘정서적인 헌신’과 더불어 ‘자아 몰두’를 보여준다.

‘헌신’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이나 남을 위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한다’는 것이다. ‘몰두(沒頭)’는 ‘어떤 일에 온정신이나 관심을 기울여 열중한다’는 뜻이다. 몰(沒)은 빠지다, 잠기다, 사라지다, 없어지다 등의 뜻이 있다. 그러니까 몰두는 머리가 사라진다, 다시 말하면 정상적인 판단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우리 편 편향에 물든 사람은 제 맘에 드는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또 그렇게 찾아낸 정보를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하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나 대상이나 사람 혹은 조직 등에 대해서 정서적으로 헌신하고, 머리가 없어져 판단이 정지되는 사람에게 가능한 선에서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라는 요구는 불가능에 가깝다. B가 주관적인 확신과 투철한 당파성(partiality)을 가진 열혈당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B의 말과 글이 학자다운 풍모와는 거리가 멀고, 품격마저 떨어져 소위 ‘지라시’ 정도로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타노비치 교수에 의하면, 우리 편 편향은 다른 편향들과는 달리 모든 인간집단에서 관찰된다. 고도로 지적인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속된 말로 B처럼 ‘가방끈이 긴 사람’일수록 오히려 편견을 체계화한다. 이렇게 ‘체계화한 편견(systematized pre-judice)’은 또 다른 편향을 부르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B 교수처럼 자신과 동일하게 특정한 신념을 지지하는 집단에 대해 정서적으로 헌신하고 깊이 몰두하는 경우, 그러니까 집단의 정체성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것이 우리 편 편향의 원천이다. 이러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부정적인 정보는 한사코 거부하거나 걸러낸다. 긍정적인 정보는 무조건 흡수하려고 한다. 이렇게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우리 편 편향은 확대 증폭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남의 편이라도 맞는 것은 맞다고 하고, 내 편이라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하라고 하면 통할까. 어림없는 일이다.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하는 편향을 ‘무행동 편향(omission bias)’이라고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선거는 끝나고 승패가 갈렸지만, 집단정체성에 몰입된 많은 이는 여전히 우리 편 편향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것이다. 이긴 측에서는 저마다 자신들이 특등 공신, 혹은 일등 공신이 될 공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보상을 목을 빼고 기다릴 것이다.

패한 측에서는 패배에 대한 원인을 아예 남 탓으로 돌리거나 내부의 적을 지목하면서 희생양을 찾으려 드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 편의 잘못은 가능한 한 보지 않으려 하고, 남의 편의 잘못을 침소봉대해서 보려는 성향은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성경’에도 이런 말이 나오겠는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장 3절)”


▒ 김진국
문화평론가, 고려대 인문예술 과정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