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서태지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 발매 기념 기자회견에서 가수 서태지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2014년 서태지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 발매 기념 기자회견에서 가수 서태지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1992년 1분기, KBS ‘가요 톱 텐’은 발라드가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전년도 마지막 달부터 5주 연속 1위를 차지한 김정수의 ‘당신’을 시작으로 김현식의 유작 ‘내 사랑 내 곁에’, 김완선의 ‘가장무도회’ 그리고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 양수경의 ‘사랑은 차가운 유혹’, 이상우의 ‘하룻밤의 꿈’이 3월까지 1등을 차지한 노래들이다. 1992년 3월 네 번째 월요일이던 23일, 시장에 한 장의 앨범이 풀린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앨범이었다. 발매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 앨범이 한국 음악의 역사를 바꾸게 될 줄. 서태지 본인도 그랬을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을 하고 있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조금씩이나마 서구 문화가 공식, 비공식적으로 쏟아졌다. 제5 공화국의 사교육 금지로 10대의 자유 시간은 이전에 비해 많았다. 시나위, 부활, 백두산 같은 헤비메탈 밴드들이 등장하며 록의 흐름이 바뀌었다. 들국화와 김현식으로 상징되는 언더그라운드의 거대한 물결이 있었다. 이문세, 이영훈 그리고 유재하로 이어지는 발라드의 혁명 또한 그 시점에 일어났다. 그뿐 아니었다. 서울 이태원 미군클럽을 중심으로 전국의 춤꾼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문나이트’처럼 외국인들이 주로 다니던 클럽에서 내국인들이 다니던 나이트클럽에서와는 다른 본토의 고난도 댄스를 연마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스타가 된 건 박남정이었고 현진영이 뒤를 이었다. 조용필과 이선희가 TV를 지배하던 시대, 물밑에서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퇴적과 융기가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런 현상의 산물이었다. 서태지(본명 정현철)는 1990년 4월 시나위 4집의 베이시스트로 음악계에 데뷔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의 인터뷰집 ‘뛰는 개가 행복하다’에 나오는 일화로, 그의 아버지 신중현이 서울 문정동에 ‘우드스탁’이라는 라이브 클럽을 운영하던 1988년의 일이다. 

선배 중에 이중산이란 사람이 있어. 그 양반이 하루는 어린애 두 명을 데리고 와서 연습을 하더라고. 드럼 치는 친구랑 베이스 치는 친구였는데, 드럼은 잘 모르겠고 베이스 치는 친구가 눈에 쏙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연습하는 걸 한참 봤어. 뽀글뽀글 파마를 했는데 귀여웠어. 어려 보이긴 하더라고. 끝나고 중산이 형한테 물어봤지. “쟤네들 누구예요?” “내가 연습하려고 데리고 다니는 애들이야.” “베이스 치는 애는 뭐예요?” “그냥 베이스 치는 애야. 어린앤데 괜찮아서 데리고 다녀.” “저한테 좀 빌려주세요.” “맘대로 해. 데려다 써.” 이렇게 됐지. 그래서 끝나고 불렀어. “이리 와 봐. 너 이름이 뭐니?” “정현철인데요.” “몇 살이야?” “사실 제가 어려요.” 고등학교 2학년인가 그렇다는 거야. “왜 머리는 기르고 다녀?” “학교 그만뒀어요.” 왜 그만뒀냐니까 음악 하고 싶어서 그만뒀대. 그래서 “내가 시나위 다시 하려고 그러는데 생각 있으면 해볼래?” “정말요?” 그러는 거야. “시나위 곡 중에 아는 거 뭐 있니?” “다 알아요.” 얘가 시나위 레퍼토리를 다 알고 있어. “혹시 ‘연착’ 할 줄 알아?” “알죠.” 하더니 바로 ‘연착’을 치는 거야. 

1990년대 대중가요계의 한 획을 그었던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 사진 조선일보 DB
1990년대 대중가요계의 한 획을 그었던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 사진 조선일보 DB

서태지와 시나위의 인연은 길지 못했다. 1990년 4집을 끝으로 탈퇴한 서태지는 밴드 무궁화에서 활동했다. 명동 마이하우스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하던 중, 댄스팀의 일원으로 무대에 오른 양현석을 만나게 된다. 그는 양현석에게 함께 팀을 할 것을 제의하고 여러 댄서들을 소개받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지 못하고, 결국 양현석이 이태원 선배이자 김완선, 박남정 등의 댄스팀을 거친 이주노에게 제의하여 서태지와 아이들의 라인업을 완성하게 된다. 이 과정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1980년대 ‘헤비메탈과 스트리트 댄서 문화’의 융합이자 청년 하위문화의 폭발점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들의 초기 제작자이자 매니저였던 유대영과 최진열 역시 이태원 나이트클럽 DJ 출신이었음을 떠올린다면 더욱 그렇다. 

그들의 첫 방송 활동은 앨범 발매 직전인 3월 14일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였지만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 채 한 달이 지나기 전인 4월 11일, 임백천이 진행했던 MBC ‘특종! TV연예’ 첫 회의 신인 발굴 코너 출연이 신화의 첫 장이 쓰이는 순간이었다. 기성세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대체로 혹평을 했지만, 이 프로그램을 지켜보던 10대들의 촉을 건드렸다. 다음 날 청소년들의 필수 청취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도 ‘난 알아요’가 흘렀다. 이 이틀 사이에 모든 게 바뀌었다. 월요일 점심, 많은 학교의 구내 방송에서 약속이나 한 듯 이 노래를 틀었다. 주말 사이 TV와 라디오를 통해 서태지와 아이들을 알게 된 모두가 ‘난 알아요’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1998년 서태지의 솔로 컴백앨범을 사기 위해 몰려든 팬들. 사진 조선일보 DB
1998년 서태지의 솔로 컴백앨범을 사기 위해 몰려든 팬들. 사진 조선일보 DB

그 뒤의 얘기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너바나가 1991년 ‘Smells Like Teen Spirit’로 팝의 1990년대를 시작했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은 ‘난 알아요’로 20세기 한국 대중음악의 마지막 10년을 열었다. ‘가왕’ 조용필을 뛰어넘는 ‘문화 대통령’의 칭호를 얻었으며, 제작자와 방송국에 ‘을’의 지위였던 가수의 위상을 ‘갑’으로 올려놓았다. 주류 핵심에서도 교육 문제, 통일 담론 등 굵직굵직한 이슈를 던졌으며 마지막 앨범에 담긴 ‘시대유감’으로 정태춘이 오랫동안 이끌어오던 가요 사전심의제 철폐에 결정타를 날렸다. 그뿐인가. 한국어로 자연스러운 랩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함으로써 단숨에 랩을 가요의 일부로 장착시켰고 메탈과 얼터너티브 록, 갱스터 랩과 테크노 같은 최신 팝 장르와 한국 대중음악의 시제 일치를 이뤄냈다. 무엇보다 현란한 댄스와 컬러풀한 의상, 자유로운 언행은 방송의 색감과 카메라 워킹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댄스 음악의 시대를 위한 초석을 깔아 놓은 것이다. 

그 초석은 이후로도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 대중음악의 메인을 차지한 댄스 음악의 힘은 1990년대가 끝날 때까지 굳건했다. 이태원의 춤꾼들은 단숨에 스타 댄스 가수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듀스와 클론, 룰라와 박진영이 대표적이다. 10대와 20대는 대중음악 시장과 미디어의 주인공을 빼앗기지 않았으며 팬클럽은 단순한 취향의 공동체를 넘어 레이블과 방송, 나아가 사회적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소비자 단체의 역할마저 수행했다. 서태지 팬클럽이 순위 프로그램 폐지, 립싱크 금지 같은 변화에 미친 영향이 대표적이다. 이 모든 것은 현재 K팝 시대의 근간이기도 하다. 1992년 3월, 한 장의 앨범이 이후의 30년에 결정적 물꼬가 됐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기획 및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