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스릴러 영화 ‘스피드’의 장면들. IMDB
액션 스릴러 영화 ‘스피드’의 장면들. IMDB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쫙 펴고 기지개를 켜는 봄이다. 낮은 봉분 같던 대지는 하품하듯 아지랑이를 토해내고 축 늘어져 있던 버드나무에는 연둣빛이 번져간다. 죽은 것 같던 마른 가지마다 꿈이 움트듯 새순이 부푼다. 이럴 때는 신나는 영화가 좋겠다. 심장을 쥐락펴락, 마음을 감았다 풀었다, 납작 엎드려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며 두 시간을 집어삼키는 영화.

고층 빌딩 어딘가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엘리베이터가 추락하기 시작한다. 30층에서 위태롭게 멈춘 승강기에 갇힌 사람들은 두려움에 떤다. 폭탄 테러범이 원하는 건 300만달러(약 37억원).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23분. 출동한 로스앤젤레스 경찰특공대 소속 형사 잭은 무사히 승객들을 구출한다. 

시민을 구한 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은 기쁨도 잠시, 잭의 눈앞에서 시내버스가 폭발한다. 그리고 울리는 공중전화 벨 소리. 엘리베이터 폭탄 테러범의 협박 전화다. 그는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한 테러를 망쳐놓은 잭을 원망하며 폭탄을 설치한 또 다른 버스가 있음을 알린다. 주행 속도가 시속 50마일(약 80㎞)을 넘는 순간 폭탄 스위치가 켜지고, 그 밑으로 내려가면 버스는 자동 폭발한다. 세 시간 안에 돈을 가져오지 않거나 그전에 승객이 내려도 버스는 폭발한다. 

잭은 경찰에 연락하고 버스를 찾아낸다. 이미 제한 속도를 넘어 달리고 있는 버스에 가까스로 올라탄 잭은 놀란 승객들을 안심시키며 경찰임을 알린다. 그런데 잡범 한 명이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총을 쏜다. 빗나간 총알은 운전기사를 쓰러뜨리고 버스는 방향을 잃고 비틀거린다. 승객들은 기사를 부축하고 앞자리에 앉아있던 애니가 재빨리 핸들을 바로잡는다.

잭은 승객들에게 위험을 알린다. 매일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나 택시, 버스나 지하철에서 누군가 뛰어 들어와 ‘여기 폭탄이 있다’고 외친다면 어떤 기분일까. 잭은 공포와 혼란에 빠진 승객들을 진정시킨다.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애니는 속도에 집중한다. 

대형 인명 사고의 경우, 어떤 사람은 타야 할 차나 비행기를 아쉽게 놓치는 바람에 목숨을 구하고, 누군가는 상황이 바뀌어 탑승하는 바람에 희생됐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곤 한다. 때로는 단순한 우연과 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된다. 과속으로 면허가 정지된 탓에 버스를 이용하던 애니도 그런 경우였다. 헐레벌떡 뛰어와 정류장을 막 떠난 차를 세워 운 좋게 탔다 했는데 폭탄 버스를 운전하게 될 줄이야. 

잭은 버스 밑바닥에 폭탄이 설치돼 있는 것을 확인하지만 해체할 수는 없다. 버스는 죽기 살기로 달려야만 한다. 그런데 뻥 뚫린 고속도로라면 모를까, 도시 한복판의 출근 시간이다. 애니는 막히는 도로를 피해 갓길 주행, 역주행, 원심력을 거스르는 과속 급회전에 하늘을 나는 공중부양까지, 시속 300㎞로 달리는 자동차 레이스보다 더 위험천만한 질주를 이어간다. 

애니가 믿음직스럽게 운전을 맡아주는 동안 잭은 특수부대원들과 연계,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모색한다. 일단 범인과 협상한 뒤 버스와 같은 속도로 나란히 달리는 구조 차량으로 총상 입은 기사를 인계하는 데 성공한다. 승객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눈다. 그런데 승객 하나가 자신도 살아야겠다며 구조차로 막무가내 건너가려다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죽음을 벗어날 길이 있다면 누군들 건너가고 싶지 않을까.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과 사랑한다고 제대로 말한 적 없는 가족들, 다음 주에 발표될 승진 소식과 결혼을 앞둔 약혼자, 곧 태어날 아기 등, 살아 돌아가야 할 수만 가지 이유가 떠오르면 왜 내가 아니라 저 사람만 구조를 받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만 한 자신들과 달리 무모하게 행동에 옮긴 사람 때문에 폭탄이 터져 다 같이 죽을 뻔했다. 더구나 그가 처참하게 죽어 나뒹굴자 슬픔보다 먼저 불쑥 찾아온 감정은 ‘내가 죽지 않아 다행이다’ 하는 안도감과 아직 살아 있다는 기쁨. 생존 앞에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깨닫고 사람들은 입을 다문다. 

버스는 불안과 죄책감이 혼재된 침묵 속에서 계속 달린다. 죽음의 신은 여전히 그들을 낚아챌 기회를 노리고 있다. 게다가 불운이란 원래 설상가상, 이중삼중으로 덮치고 행운은 느릿느릿 쥐꼬리만큼 다가오는 법. 문제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더 큰 위기가 닥치고 잠깐의 안심 뒤엔 더 깊은 절망감이 밀려든다. 그러나 잭은 온몸을 던져 해결책을 찾아내고 애니도 용기를 다해 속도를 지켜낸다. 그렇게 하나의 운명체가 된 사람들을 실은 버스는 살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버스는 공항 화물터미널에 진입한다. 교통정체나 도로 끊김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잭은 범인과 또 한 번 협상한 뒤 달리는 버스에서 잠시 내려 특수부대와 합류한다. 남겨진 승객들은 잭이 자기들을 버리고 간 게 아니냐며 겁을 먹는다. 하지만 짧은 시간일망정 생사의 고비를 함께하는 동안 잭을 믿게 된 애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럴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 버스에 타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녀의 믿음대로 잭은 버스가 폭발하기 직전 승객들을 구출한다. 마침내 ‘살았다’ 하고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잭과 범인의 두뇌 싸움은 사실 여기부터 시작이다. 이야기는 더 팽팽하게 긴장을 끌어올리며 범인과 잭의 정면 대결로 치닫는다. 

폭파범은 왜 무고한 사람들을 인질 삼아 엄청난 돈을 내놓으라고 경찰을 위협하는 것일까? 왜 어떤 사람은 혼자 살겠다며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데 왜 어떤 사람은 타인을 구하겠다고 사지로 뛰어드는 것일까?

어느덧 중년이 된 산드라 블록과 키아누 리브스를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던 1994년 영화다.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다이 하드’의 촬영감독이었던 장 드봉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속도와 스릴은 애피타이저, 유머를 알맞게 뒤섞은 영웅의 활약은 풍성한 메인 디시, 악당에 대한 마땅한 응징과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에 대한 기대감은 달콤한 디저트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 제한된 속도, 약간의 위기감도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다만 나른한 인생의 봄날엔 졸고 있는 마음을 깨워줄 과감한 드라이브와 거침없는 스피드를 추가할 것!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