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이 4월 5일 4년 만에 신곡을 발표했다. 아래 사진은 신곡 ‘봄여름가을겨울’ 발표를 알리는 홍보 이미지. 오른쪽은 5인조였던 빅뱅의 모습. 사진 YG엔터테인먼트
빅뱅이 4월 5일 4년 만에 신곡을 발표했다. 아래 사진은 신곡 ‘봄여름가을겨울’ 발표를 알리는 홍보 이미지. 오른쪽은 5인조였던 빅뱅의 모습. 사진 YG엔터테인먼트

빅뱅이 컴백했다. 4월 5일 4년 만에 싱글 ‘Still Life’를 냈다. 2018년 11월부터 오랫동안 전국을 시끄럽게 한 ‘버닝썬 게이트’ 이후 첫 활동이다. 이 사건으로 5인조 그룹은 4인조가 됐다. 사건 전개 과정에서 승리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의 사건과 의혹도 동시에 불거졌다. 몰락도 이런 몰락이 없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명백한 범죄자인 승리를 제외한 그 누구도 언론 및 소셜미디어(SNS)에 아무런 입장을 내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상투적 문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톱스타들이 그렇게 은둔했다 나타났다. 

그들의 컴백 시도는 사실 2020년,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에 출연한다는 뉴스를 통해서였다. 하필 그때 코로나19가 인류를 덮쳤다. 코첼라를 비롯한 모든 페스티벌이 취소됐고 그들의 컴백도 무산됐다. 그리고 2년이 지나 디지털 싱글로 조용히 돌아왔다. 

신곡은 ‘정물화’라는 제목처럼 정적인 곡이다. 미래와 현재보다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 담긴 노래다. 발매 다음 날 탑이 소속사인 YG엔터테인먼트와 계약 해지를 알렸다. ‘개인 활동을 하되, 여력이 있으면 빅뱅과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그들이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는 게 단시간 안에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Still Life’는 오랜 쉼표의 종지부이자 잊히는 듯한 첨예한 논란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발화점이기도 하다. 발매 직후 모든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차지한 반면 ‘음악과 아티스트를 동일시해야 하는가?’라는 화두에도 불이 붙었다. 빅뱅만큼 한국 아이돌 역사를 바꾸고 또한 가장 큰 사고를 친 그룹이 또 있었던가. 이 낯선 컴백 또한 마찬가지다. 


2019년 3월 14일 오후 성접대 의혹으로 빅뱅 멤버 승리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경찰청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2019년 3월 14일 오후 성접대 의혹으로 빅뱅 멤버 승리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경찰청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빅뱅은 2006년 데뷔했다. 시작부터 달랐다. SM엔터테인먼트와 DSP가 주도하던 기존의 남자 아이돌 시장은 철저히 모범생과 신비주의의 원칙을 따랐다. H.O.T와 젝스키스, 동방신기와 SS501이 그랬다. 트레이닝 과정은 베일에 싸여 있었고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을 향해 달리는 방식이었다. 지금도 유효한 아이돌 성공의 방정식이지만, 빅뱅은 MTV의 아이돌 육성 리얼리티쇼 ‘리얼다큐 빅뱅’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선발 과정을 공개했다. 탈락을 피하기 위한 경쟁이 그대로 노출됐다. 양현석의 비판 앞에서 주눅 드는 모습, 서로를 질투하는 모습, 급기야 싸우고 우는 모든 과정이 그대로 방송됐다. 아이돌 오디션이 일반화된 지금은 익숙한 이 서사는 그때만 해도 신선했다. 보여주고 싶은 모습뿐만 아니라 보여주기 싫은 모습까지 노출해가며 데뷔한 그들이 처음부터 정상에 있던 건 아니었다. 대중에게 초기의 빅뱅은 지누션과 원타임을 잇는, 또 하나의 YG표 힙합 그룹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또한 당시의 대중음악계는 SG워너비로 대표되는 ‘소몰이 발라드’와 비와 세븐처럼 1인형 아이돌이 양분하고 있던 때였다. 동방신기조차 국내보다는 일본 활동에 방점을 찍고 있었으니, 그 누구도 다시 아이돌의 시대가 돌아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7년 여름, 빅뱅의 첫 EP ‘Always’는 모든 걸 바꾸기 시작했다. 이 앨범에 ‘거짓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비슷한 시기 등장한 원더걸스의 ‘텔 미’,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삼각함대를 이뤄 음악계 판도를 흔들었다. 세상은 그 순간을 아이돌 르네상스라 부르기 시작했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걸그룹 투톱 구도를 이뤘고 빅뱅은 보이밴드 시장을 순식간에 독주했다. ‘거짓말’은 팬덤에만 사랑받던 기존 아이돌 그룹 히트곡과 달리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처음부터 치고 나오는 훅에 자유분방한 안무는 소몰이 발라드에 지친 대중에게 청춘의 호르몬을 선물했다. 그뿐인가. 아이돌 그룹에 대한 선입견들을 빅뱅은 깨부쉈다. 예를 들어 기성 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부를 뿐이라는 프레임은 통하지 않았다. 송라이팅의 중심에 지드래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돌보다는 아티스트였다. 패션쇼 런웨이에서나 볼 법한 패션 대신, 거리의 룩과 짙은 색 메이크업으로 카메라 앞에 선 그들은 ‘모범생’이 아니라 ‘다크 아이돌’이었다. 그들이 입는 옷 대부분이 빠르게 거리로 퍼졌다. 헤겔의 변증법적으로 말하자면, ‘정’의 논리로 형성된 한국 아이돌 역사에서 그들은 명백한 ‘반’의 노선을 내세우며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다.


그룹 빅뱅
그룹 빅뱅

이런 흐름은 내수 산업에서 수출 산업으로 진화해온 K팝의 역사에서도 의미를 가진다. 당시 나는 매년 일본에 가곤 했었다. ‘거짓말’ 이전까지 한국 아이돌은 일본의 대형 레코드 가게에서 한류 코너에 놓여 있곤 했었다. 보아 정도만 예외였다. 빅뱅이 일본 진출을 한 이후 그들의 음반은 월드 뮤직 코너에서 볼 수 있었다. 빅뱅의 음악과 스타일이 기존의 한류와는 다르다는 의미였다. 2010년 일본 록 페스티벌인 서머소닉에서 그들은 기존에 이 페스티벌에 섰던 한국 뮤지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관객을 모았다. 이 행사가 일본의 대표적 록 페스티벌임을 감안하면, 당시 일본 음악 시장이 빅뱅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빅뱅은 한국 아이돌 산업이 한류에서 K팝으로 넘어가는 중간 다리에 있었다. 

아이돌이자 아티스트였던 빅뱅은 록스타이기도 했다. 도덕과 모범보다는 자유와 욕망의 아이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논란도 끊임없었다. ‘거짓말’ 그리고 지드래곤의 ‘하트브레이커’가 표절 논란에 휩싸였을 때, 당사자인 프리템포와 플로라이다가 직접 표절이 아니라는 입장을 발표하며 다른 이들의 개입 여지를 없앴다. 표절이라는 것이 민사, 즉 저작권 침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사례는 가요계의 표절 시비 담론을 바꾸는 계기였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말이다. 기존 아이돌 가수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지드래곤의 대마초 흡입 해프닝이라든가, “내가 바람 펴도 너는 바람 피지 마”라는 가사를 담은 태양의 ‘나만 바라봐’ 같은 일들도 있었다. 2010년대 중반 불어닥친 ‘미투’로 대표되는 정치적 올바름(PC) 이전이라 가능했던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빅뱅은 대중이 바라는 아이돌의 완전무결함과 도덕주의를 거스르곤 했다. 그리고 결국, 2018년, 버닝썬 게이트가 터졌고 빅뱅은 연예면 대신 사회면 톱을 장식하는 이름이 됐다. 방탄소년단의 ‘LOVE YOURSELF:Tear’가 한국 대중음악사상 처음으로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던 해다.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빅뱅은 SNS와 유튜브가 등장하기 전, 매스미디어 시대의 마지막 대형 스타이자 사그라들던 아이돌 시장에 그 누구보다 밝은 불을 댕겼던 존재다. 시대가 원했지만 시대의 선을 넘었다. 또한 시대는 바뀌었다. 방탄소년단과 아미의 캐치프레이즈 ‘선한 영향력’에서 알 수 있듯 다시 빅뱅 같은 존재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열광과 냉소, 천국과 지옥의 극단을 오가던 그들에게 ‘Still Life’는 마침표일까 분기점일까.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기획 및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