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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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기적이다. 나약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아니면 누구도 지켜주지 않으므로. 그러니 이기적이라는 말은 가치 중립적이다. 여기에는 어떤 선과 악도 없다. 그런데 이런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이타적인 존재가 될 때가 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다. 사랑할 때 인간은 타인을 위해 선택하고 행동한다. 그런가 하면 죽음이라는 끝은 끝나지 않음을 위해 무엇인가 도모하게 한다. 그중에는 아이를 낳는 일도 있다. 타인을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은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을 남기게 한다. 많은 엔딩이 끝나지 않음을 예고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끝나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다. 끝이 너무나도 명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끝은 완전한 끝을 위해 봉헌된다. 완전한 끝은 사라짐을 뜻한다. 더 이상 어떤 형태로도, 어떤 형식으로도, 비유로도, 상징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것. 임레 케르테스는 처음부터 이 완전한 사라짐을 수행하기 위해, 오직 이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글을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듯 물리적인 단절을 선택하는 소설, 이렇듯 차갑게 사라지고 싶어 하는 소설을 쓰는 작가는 많지 않다. 끝나지 않으려는 인간의 본능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계속되려 하는 본능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가 선택한 엔딩은 계속되려 하는 인간의 본능을 역행한다. 남기려는 욕망으로부터 도망친다.

일찍이 거부하고 역행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 그런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바틀비다. 바틀비는 허먼 멜빌의 소설 ‘바틀비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뉴욕 월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미국 사회의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제3의 인간을 보여 준다. 물질화된 세계 속에서 도구화되고 순치된 인간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 그 하지 않겠다는 선택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고난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지 않는 것이 하는 것보다 더 힘든 선택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는 것은 물리적인 고통을 수반할지언정 정신적으로는 관성과 습관, 남들과 구분되지 않는 평범함 속에서 안정되는 것이다. 반면 하지 않는 것은 관성과 습관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남들과 구분되는 일이며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불안전과 불확실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고독한 단독자가 되는 길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도 ‘아니요’라는 부정적인 대답으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끝까지 이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화두에 붙잡힌 채 진행된다. 그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덧붙이는 이유는 급진적 주장을 동반한다. 강력한 우리의 본능이 우리의 본능에 반하여 작동하는 것이, 말하자면 우리의 반본능이 우리의 본능을 대신하고, 더욱이 본능인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 이미 아주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도대체 무슨 질문이 이토록 강렬한 ‘부정’을, 본능이 되어 버린 반본능으로서의 ‘부정’을 확신하게 만든 걸까.

산책 중 오블리트 박사가 주인공에게 한 일은 그저 아이가 있는지 무심코 질문을 던진 게 전부다. 아이가 있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아니요’는 ‘안 돼’라는 더 강력한 부정으로 나아간다. 그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으로서 경험 때문이다. 그는 이 세계의 도덕적 비참과 비참의 지속에 대해 확신한다. 말하자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의 본능에 반하는 것이지만 이 반본능이야말로 또 하나의 본능이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소설은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위한 독백이자 기도다. 자신을 영원히 가라앉혀 달라는 마지막 기도에는 자신의 사라짐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비참한 세상의 사라짐에 대한 기원이 담겨 있다.

사라짐으로서의 끝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삶에 동화되지 않는 것이다. 주인공은 삶과 자신을 철저하게 분리시킨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삶과 동화된다는 것, 삶과 자신이 뒤섞인다는 것, 말하자면 삶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삶과 동화된다는 건 삶이 가져다줄 불안정함을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행복과 불행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갖는 것이다. 주인공은 그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차단한다. ‘이따위 시대’와 ‘이따위 세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주어진 삶의 의미를 그저 생존으로 한정시킨다. 삶을 형벌처럼 견디는 데에만 의미를 둔다.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이따위 시대와 이따위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plus point

임레 케르테스(Imre Kertesz)

사진 위키피디아
사진 위키피디아

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목재상을 하던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박해에 의해 열네 살의 나이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부다페스트로 돌아온다. 일간지 편집인, 공장 노동자, 프리랜서 작가, 번역자로 일하면서 니체, 지크문트 프로이트 등 많은 철학가와 작가의 작품을 독일어에서 헝가리어로 번역, 소개했으며 1973년에는 13년간의 집필 기간을 걸친 첫 소설 ‘운명’을 완성한다. 이후 운명 4부작에 속하는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등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했다.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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