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셔터홈, 화이트 진판델 2. 베린저, 화이트 진판델 3. 보글, 올드 바인 진판델 4. 날리 헤드, 올드 바인 진판델 5. 페우디 디 산 그레고리오,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
1. 셔터홈, 화이트 진판델 2. 베린저, 화이트 진판델 3. 보글, 올드 바인 진판델 4. 날리 헤드, 올드 바인 진판델 5. 페우디 디 산 그레고리오, 프리미티보 디 만두리아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진판델(Zinfandel)을 처음 맛본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쯤이었다. 런던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취미로 와인을 공부할 때였는데,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와인을 고르다 독특한 레이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꼬이고 뒤틀린 포도나무 그림이 조금은 괴기스러웠고 그 아래엔 올드 바인 진판델 (Old Vine Zinfan-del)이라고 적혀 있었다. 진판델 고목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레드 와인이었다. 가격도 적당했고 아직 마셔보지 못한 와인을 찾던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구입을 결정했다. 하지만 막상 집에 돌아와 와인을 열어 보니 뿜어져 나오는 아로마가 심상치 않았다. 풍성하게 퍼지는 달콤한 풍미,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 ‘이 와인은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책 저 책을 꺼내 들고 진판델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파면 팔수록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잔뜩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도 마트나 와인 숍에 가면 진판델 와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분홍빛이 어여쁜 로제 와인도 있고 루비 빛이 매혹적인 레드 와인도 있다. 모두 미국산이다. 미국인의 진판델 사랑은 상당하다. 미국 와인의 90%를 생산하는 캘리포니아 포도밭의 10% 이상을 진판델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진판델은 한때 ‘미스터리’한 포도였다. 그 유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기르는 양조용 포도는 대부분 유럽에서 가져온 것들인데, 유럽 어디에도 진판델이라는 품종이 없고 과거의 기록을 샅샅이 뒤져 봐도 진판델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진판델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정체가 슬슬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였다. DNA 검사 결과 진판델이 이탈리아 풀리아 지방에서 재배하는 프리미티보(Primitivo)임이 밝혀진 것이다. 풀리아는 부츠 모양의 이탈리아반도에서 구두 굽 자리에 있는 지역이다. 베일에 싸인 듯한 신비감을 내심 즐기던 미국은 실망하는 눈치였고, 이탈리아는 미국에서 잘나가는 진판델이 프리미티보라는 사실에 반색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2001년 반전이 일어났다. 알고 보니 프리미티보도 18세기에 크로아티아에서 전해진 품종으로, 지금은 거의 멸종 상태인 체를례나크 카스텔란스키(Crljenak Kastel-anski)가 조상이었던 것이다. 대관절 이 포도는 어떻게 크로아티아에서 이탈리아와 머나먼 미국까지 오게 된 걸까? 이름은 왜 프리미티보와 진판델로 바뀐 걸까?

미국으로 건너온 계기부터 알아보자. 19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황실 묘목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통치하던 나라들에서 수집한 각종 삽수(꺾꽂이용 가지)를 관리하던 곳이었는데 하루는 미국으로부터 포도나무 주문이 들어왔다. 여러 가지 품종이 배에 실렸고 담당자는 삽수마다 이름표를 달았다. 이때 실수가 발생했다. 체를례나크 카스텔란스키에 지어판들러(Zierfandler)라는 엉뚱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지어판들러는 영어식으로 부르기 쉽게 진판델로 바뀌었고, 이는 훗날 진판델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든 황당한 원인이 되고 말았다.


달콤한 로제부터 진한 레드까지,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 

진판델은 생명력이 강인하고 수확량이 풍부해 미국에서 재배지가 점점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레드 와인을 주로 생산하던 진판델에 변신의 기회를 가져다준 사건이 일어났다. 1975년 셔터홈(Sutter Home) 와이너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진판델의 발효가 아무런 이유 없이 중단된 것이다. 레드 와인이 만들어지려면 포도즙이 발효되는 내내 포도 껍질에서 붉은색이 추출되고 당분이 모두 알코올로 변해야 한다. 그런데 발효가 도중에 멈췄으니 잔당이 남아 단맛이 나고 알코올 도수는 낮으며 색도 빠지다 말아 연한 분홍빛이 나는 와인이 만들어진 것이다. 의도치 않게 탄생한 이 로제 와인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셔터홈은 화이트 진판델이라는 이름을 붙여 시장에 내놓았다.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 반응이 폭발적이었고 꺼지지 않는 수요는 급기야 화이트 진판델을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피크닉 와인으로 만들었다.

화이트 진판델은 진지하게 음미하며 마시는 와인이 아니다. 왁자지껄 떠들며 가볍게 즐기기 좋은 스타일이다. 알코올 도수가 10% 정도로 낮아서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에게도 부담이 없다.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싸서 소풍을 갈 때 화이트 진판델을 한 병 챙겨보자. 장밋빛 색상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산뜻한 과일 향이 음식과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차게 식혀서 닭갈비나 제육볶음처럼 매콤한 음식에 곁들이면 시원하고 달콤한 와인 맛이 입안의 매운맛을 개운하게 씻어준다.

하지만 진판델 본연의 맛은 누가 뭐래도 레드 와인이다. 특히 진판델 고목에서 생산된 와인은 품질이 탁월하다. 진판델은 나이가 들수록 수확량은 줄지만, 품질이 월등한 포도를 생산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런 와인을 올드 바인 진판델로 따로 구분해 판매한다. 올드 바인 진판델은 우리 입맛에도 상당히 잘 맞는다. 감미로운 과일 향, 묵직하고 부드러운 보디감, 갖가지 향신료의 복합적인 풍미가 순식간에 미각을 사로잡는다.

진판델 고목은 외관도 한 그루의 예술작품 같다. 긴 세월을 견디며 이리저리 뒤틀린 나뭇가지가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인간의 주름진 피부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노년의 현자가 전하는 혜안의 일침처럼 올드 바인 진판델의 긴 여운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캘리포니아의 로다이 지역은 수령이 100년 이상 된 진판델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올드 바인 진판델의 참맛을 경험하고 싶다면 로다이에서 생산된 것을 선택해 보자.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진판델을 프리미티보라고 부른다. 다른 포도보다 일찍 익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최초’ 또는 ‘앞선’이라는 뜻의 프리미(primi)가 붙어 이름이 프리미티보가 됐다고 한다. 유전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진판델과 프리미티보는 각기 다른 클론이다. 풀리아와 캘리포니아의 환경이 다르다 보니 같은 품종이지만 다르게 발전해 온 것이다. 프리미티보와 진판델은 생김새도 다르지만 와인 맛도 다르다. 진판델은 아로마가 달콤하고 보디감이 묵직한 데 비해 프리미티보는 향미가 신선하고 질감이 강건하며 은은한 꽃향기가 우아함을 더한다.


▒ 김상미
와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