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장면들. 사진 IMDB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장면들. 사진 IMDB

여름은 욕망의 계절이다. 사람들은 반라의 육체가 백사장을 메운 바다, 달아오른 태양보다 더 뜨거운 눈길로 서로를 탐색하는 해변으로 달려간다. 누군가는 바닷물을 다 마셔버릴 것처럼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떤 이는 모래성을 쌓으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다 익지 못한 열매가 떨어지듯, 어느 바닷가에서는 일렁이는 물결 위로 욕망의 제물이 된 시체 한 구가 떠오른다.

톰 리플리는 가진 게 없는 남자다. 톰은 필립을 데려오면 5000달러(약 660만원)를 주겠다는 그의 아버지의 제안을 받고 미국에서 이탈리아까지 먼 길을 날아왔다. 고교 동창 필립은 톰과 달리 모든 걸 다 가진 남자다. 아니, 모든 걸 다 가진 남자의 아들이다. 5년 만에 먼 나라에서 재회한 필립 앞에 선 톰은 자신의 초라한 신세를 되새김질한다.

아버지의 감시에서 벗어나 방탕한 생활을 한껏 즐기고 있는 필립은 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는 톰을 친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깟 돈 5000달러가 뭐라고,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돌아가자고 조르는 톰이 우습기만 하다. 그는 내일이라도 당장 떠날 것처럼 톰의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애끓게 한다. 잡아먹기 전 실컷 데리고 노는 고양이처럼. 설마 그 생쥐가 자기 목을 물어뜯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쉽게 목돈을 만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톰의 내면에는 점차 열등감과 모멸감이 쌓여간다. 그래도 돈을 손에 넣을 때까지는 참자, 이를 악문다. 대신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필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 녀석도 아버지 돈으로 놀고먹는데 왜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의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톰은 몽상에 빠진다. 필립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탐나는 건 마르쥬다. 저 아름다운 여자가 나를 바라봐 준다면, 그녀가 나를 욕망해 준다면 얼마나 신날까. 멋대로 화내고 소리 지르며 못되게 구는 필립보다 내가 더 괜찮은 남자 아닌가. 만약 필립처럼 돈이 많다면 그녀도 나를 바라볼 텐데. 

톰은 필립의 방에서 그의 신발을 신어본다. 그의 옷을 걸치고 거울 앞에 선다. 근사하다. 톰은 필립을 흉내 내 마르쥬에게 키스하듯 거울 속 자기 입술에 입을 맞춘다. 하지만 거울 밖, 현실로 돌아온 톰은 초라하다. 톰은 필립이 되고 싶었다. 겨우 5000달러에 만족하려 했다니. 톰은 필립의 삶을 통째로 빼앗고 싶었다. 

톰의 욕망은 공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질투심을 이용해서 마르쥬를 필립과 떼어놓는다. 요트에 단둘이 남았을 때, 톰은 필립을 죽이고 시신을 바다에 유기한다. 톰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데다 범죄까지 눈치챈 또 다른 친구도 죽여버린다. 톰은 천연덕스럽게 필립이 살아있는 것처럼 연기하고 신분을 위조하고 알리바이를 조작한다. 

첫 번째 살인을 했을 때 톰은 죽은 필립의 얼굴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시신을 감싼 방수포가 벗겨질 때마다 몇 번이나 다시 덮어씌운다. 하지만 두 번째 살인 후 톰은 창밖을 내다본다. 길에서 노는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운 듯 잠시 바라보지만 그뿐이다. 그는 자신이 죽인 시체 옆에서 잘 구워진 통닭을 맛있게 뜯어 먹는다. 

자기가 늘어놓은 거짓말에 속아 그것이 진실이라 믿고 거짓을 되풀이하는 증상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화 속 톰 리플리는 소시오패스라 불리는 인격 장애에 가깝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도덕적 판단력이 없어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와 달리 그는 옳고 그름을 냉정히 구분할 수 있다. 다만 목적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훔치고 때리고 죽인다.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는다.

경찰은 필립이 우발적으로 친구를 죽이고 죄책감을 못 이겨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낸다. 톰에 의한 완벽한 범죄 시나리오의 완성이다. 필립 소유였던 것은 이제 모두 톰의 것이다. 아둔한 세상은 발밑에 있다. 그 무엇도 톰을 막아서지 못하리라. 그는 조금도 거리낌 없는 마음으로 지중해의 눈 부신 태양을 마주한다. 축복처럼 쏟아지는 햇살 속에 누워 그는 만족스럽게 웃는다.

영화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범죄소설 ‘리플리’ 5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 ‘재능 있는 리플리’를 원작으로 한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미남의 대명사였던 알랭 들롱이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며 톰 리플리를 연기했다. ‘금지된 장난’의 르네 클레망 감독이 연출, 1960년에 발표한 수작이다. ‘대부’ ‘길’ ‘로미오와 줄리엣’의 음악을 맡았던 니노 로타의 주제가도 귀에 익숙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언제까지 톰을 위해 존재할까. 톰의 욕망은 우리들의 욕망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욕망을 실현시키려고 도둑질하거나 살인하지는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빈자리가 쓸쓸할지언정, 여백으로 남겨둘 줄 안다. 톰의 거듭된 살인은 정상참작의 여지 없이 완전범죄를 노린 잔혹범죄일 뿐이다. 

소설가 하이스미스도 “톰 리플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며 자신이 창조한 인물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영화는 권선징악적 결말을 예고하지만 원작 소설은 살인을 계속 저지르면서도 선량한 사람인 양 이웃들과 섞여 살아가는 것으로 완결된다. 톰에겐 해피엔딩이지만 독자에겐 그래서 더 소름 끼치는 결말이다. 그들이 우리 가까이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니까. 영화와 소설에서 보여준 잘생긴 얼굴과 신사적인 매너에 속아 그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호감과 연민을 느낀다는 면에서는 더욱.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엔 자신도 모르는 어둡고 무서운 악인이 잠자고 있다. 저 인간만 없으면 되는데, 하는 음산한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순간, 파멸의 방망이를 든 도깨비가 귀를 쫑긋, 눈을 번쩍 뜨고는 가슴을 찢고 뛰쳐나온다.

살아간다는 뜻의 生(생)은 소(牛)가 외나무다리(一)를 건너는 위태로움을 상형화한 것이라고 한다. 아차 하는 순간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 있다. 하루하루가 외줄 타기다. 탐욕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고 한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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