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이 미야케가 향년 84세로 8월 5일 별세했다. 고인은 1970년대 미야케 디자인 스튜디오 설립을 시작으로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50년 이상 활동한 세계적인 디자이너다. 사진은 2016년 3월 15일 도쿄국립신미술관을 방문한 고인의 생전 모습. 사진 연합뉴스
이세이 미야케가 향년 84세로 8월 5일 별세했다. 고인은 1970년대 미야케 디자인 스튜디오 설립을 시작으로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50년 이상 활동한 세계적인 디자이너다. 사진은 2016년 3월 15일 도쿄국립신미술관을 방문한 고인의 생전 모습. 사진 연합뉴스

스티브 잡스의 검정 터틀넥으로 유명한 일본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가 84세 나이로 영원한 작별 인사를 했다. 일본 주요 언론들은 이세이 미야케가 8월 5일 간암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패션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디자이너인 만큼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알려지자마자, 전 세계 패션 언론들은 일제히 이세이 미야케의 추모 기사를 올렸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미야케의 빅 팬은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였다. 세상을 뒤바꾼 테크놀로지의 신은 미야케의 검정 터틀넥을 거의 제2의 피부처럼 평생 입고 다녔다. 사람들은 잡스의 옷장에 똑같은 미야케의 검정 터틀넥이 수십 벌 걸려 있을 거라 상상했으며, 검정 터틀넥은 스티브 잡스를 설명하는 하나의 아이덴티티가 됐다. 실제로 미야케는 스티브 잡스를 위해 수백 벌의 검정 터틀넥을 제작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세이 미야케 패션 역사에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적인 예술)’란 뉴 웨이브를 일으킨 실험가이자 혁신가였다. 일본 전통의 종이접기 오리가미를 이용한 플리츠(pleats·주름) 디자인은 패션사에 신선한 혁명으로 기록됐다. 1988년쯤에 실험하기 시작한 플리츠는 옷을 입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자 했던 미야케의 패션 철학을 담은 것이다. 1993년에는 ‘플리츠 플리즈(Pleats Please)’를 출시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진 ‘플리츠 플리즈’ 라인은 섬세한 아코디언 모양의 주름을 특징으로, 일상생활에서 라운지 웨어를 입은 듯한 편리함과 패셔너블한 스타일을 동시에 누리게 했다. 무중력 패션이라 불릴 만큼 가볍고,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또한 대부분의 ‘플리츠 플리즈’ 의상들은 단추, 지퍼, 스냅 등이 없이 디자인됐다. 꽉 끼는 팔 구멍이나 윤곽 잡힌 허리선도 없었다. 그리고 열처리 시스템을 독점적으로 개발했는데, 이 혁신적인 기술은 옷의 주름과 디자인 원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또한 구겨지거나 찌그러지지 않고 자유롭게 세탁할 수 있게 했다. 돌돌 말아서 가방에 구겨 넣어도 옷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니 여행이나 출장 짐 싸기는 놀랍게 간편해졌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아방가르드한 디자인과 컬러 조합에 세계 패션계가 환호했다. 곧 미야케는 파리에서 패션쇼와 전시를 갖는 최초의 일본인 디자이너가 됐다. 일본 패션을 세계화한 선구자로서, 요지 야마모토와 꼼 데 가르송의 레이 카와쿠보 같은 동시대 디자이너들에게 세계화의 문을 열어주었다.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진 ‘플리츠 플리즈’ 라인은 섬세한 아코디언 모양의 주름이 특징이다. 사진 이세이 미야케 홈페이지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진 ‘플리츠 플리즈’ 라인은 섬세한 아코디언 모양의 주름이 특징이다. 사진 이세이 미야케 홈페이지
‘플리츠 플리즈(Pleats Please)’ 매장. 사진 이세이 미야케 홈페이지
‘플리츠 플리즈(Pleats Please)’ 매장. 사진 이세이 미야케 홈페이지

이후, 아코디언처럼 줄어들고 늘어나는 미야케의 플리츠 콘셉트는 작고 화려한 삼각형으로 층을 이룬 그물망 천으로 만들어진 바오바오(bao bao) 백으로 발전했다. ‘플리츠 플리즈’의 무중력 패션들처럼 ‘바오바오’ 백 역시 자유롭게 늘어났고 놀랍도록 가벼웠다. 국내에서도 ‘국민 백’으로 불릴 만큼 다채로운 컬러와 사이즈의 바오바오 백이 대유행 했었다. 

동시에 미야케의 혁신은 향수 산업으로 이어졌다. 1992년, 봄의 꽃향기를 담은 여성용 향수 ‘로디세이(L'Au d'Isse)’는 가장 대표적인 향수의 이름이 됐다. 미야케는 향수 용기를 디자인했는데, 미니멀한 유리 원뿔의 디자인은 파리의 어느 날 밤 에펠탑 너머로 떠오르는 달에 영감받아 창조된 것이다. 

이세이 미야케는 1938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타마(多摩)미술대학 재학 중 1963년 제1회 컬렉션 ‘천과 동의 시’를 발표하며 패션계에 입문했다. 1965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상조합학교에서 공부했고, 기라로쉬의 보조 디자이너로 있다가 1968년에는 지방시 보조 디자이너로 일했다. 이후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윌리엄 드 쿠닝 등 같은 팝아트의 열기와 실험예술로 뜨거운 세계 문화의 중심 뉴욕으로 눈을 돌렸다. 1969년 뉴욕 제프리 빈의 기성복을 디자인했으며, 1971년에는 뉴욕에서 첫 번째 컬렉션을 발표했고, 뉴욕 블루밍데일백화점에 이세이 미야케 코너를 개설했다.


바오바오 백. 사진 이세이 미야케 홈페이지
바오바오 백. 사진 이세이 미야케 홈페이지

1980~90년대 르네상스를 누렸던 아방가르드 패션의 유행이 점점 사라지긴 했지만, 미야케의 실험 정신은 변함없었다. 2000년엔 옷감을 재단하고 바느질할 필요가 없이 옷의 제작 과정을 단순화하기 위한 특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A Piece Of Clothes’ 또는 ‘A-POC’라 불린 이 프로젝트는 하나의 실을 컴퓨터에 의해 프로그램된 산업용 뜨개질이나 직조 기계에 넣을 수 있었다. 하나의 공정을 통해 하나의 직물 튜브가 완성됐고, 그 튜브는 경계선을 따라 가위로 잘라 드레스, 모자, 블라우스를 만들 수 있었다. 놀라운 상상력의 패션 혁신가임을 다시 증명했다. 

옷이 디자인의 한 형태라고 말했던 미야케의 의상은 매우 예술적이어서 건축가, 사진가 등과 다양한 협업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건축가이자 제품 디자이너인 론 아라드(Ron Arad)와 함께 일하면서, 론 아라드의 8자 모양 리플 의자(Ripple Chai)의 커버 역할을 겸할 수 있는 니트 재킷, 바지 및 스톨링인 ‘A-POC Trampoline’을 창작했다. 이세이 미야케의 플리츠 장식을 적용한 이딸라의 가방도 특별했다. 손잡이를 들어 올리면 선명한 색상의 가방이 꽃봉오리처럼 풍성하게 펼쳐진다. 또한 패션 사진작가 어빙 펜(Irving Penn)과 협업으로 두 권의 책을 완성했다. 그의 주요 작품들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영구 소장품이 되기도 했다. 

이세이 미야케의 혁신적인 패션 콘셉트가 패션사 속에 박제되어 박물관에 보관되는 것만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 자하 하디드와 같이 고인이 된 유명 인사들에 이어, 킴 카다시안, 리한나, 비욘세 등이 이세이 미야케의 팬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워킹 패션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리한나는 1978년 빈티지 이세이 미야케를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최근 떠오르는 팝 스타 도자 캣 역시 빈티지 이세이 미야케를 입고 레드 카펫에 서서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이런 다양한 세대의 스타일 해석을 통해, 이세이 미야케의 혁신과 패션 철학은 계속될 것이다.


▒ 김의향
패션&스타일칼럼니스트, 케이노트(K-note)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