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펨퍼트(왼쪽) 니타르디 와이너리 대표와 고(故) 김창열 화백. 사진 신동와인
피터 펨퍼트(왼쪽) 니타르디 와이너리 대표와 고(故) 김창열 화백. 사진 신동와인
김창열 화백의 그림이 들어간 카사노바 디 니타르디 와인 병 이미지(왼쪽). 화가들의 작품으로 완성된 카사노바 디 니타르디 와인들. 사진 신동와인
김창열 화백의 그림이 들어간 카사노바 디 니타르디 와인 병 이미지(왼쪽). 화가들의 작품으로 완성된 카사노바 디 니타르디 와인들. 사진 신동와인

좋은 와인을 맛볼 때면 훌륭한 작품 한 점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카사노바 디 니타르디(Casanuova di Nittardi)도 그런 와인 중 하나다. 레이블을 장식하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 와인의 맛을 한층 살린다. 이 와인의 2011년산 레이블은 고(故) 김창열 화백의 작품이다. 십여 년 전 김 화백을 만나 레이블에 실을 그림을 직접 의뢰한 피터 펨퍼트(Peter Femfert) 니타르디 와이너리 대표가 최근 방한했다. 독일인인 그는 프랑크푸르트 소재 디 갤러리(Die Galerie) 화랑과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니타르디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다. 예술과 와인의 결합을 훌륭하게 성사시킨 그는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을까? 그를 만나 직접 들어 봤다.

 

니타르디 와이너리 전경. 사진 신동와인
니타르디 와이너리 전경. 사진 신동와인

펨퍼트를 와인의 세계로 이끈 것은 아내 스테파니아였다. 베네치아 출신인 그녀는 피렌체에서 공부한 역사학도다. 토스카나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녀는 늘 그곳에 작은 집 한 채를 갖고 싶어 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1981년 두 사람이 토스카나를 여행했을 때 일이다. 아침 일찍 조깅을 즐기던 펨퍼트는 우연히 포도밭에 둘러싸인 집 한 채를 발견했다. 한눈에 반한 그는 곧바로 주인을 만나 설득 끝에 집과 포도밭을 매입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니타르디 와이너리다. 그런데 그곳은 알고 보니 한때 미켈란젤로의 소유였다. 화랑 대표가 미켈란젤로의 집과 포도밭을 사다니. 500년을 뛰어넘은 그야말로 대단한 인연이다.

니타르디가 위치한 곳은 이미 12세기부터 넥타르 데이(Nectar Dei·신의 감미로운 음료)라고 불릴 정도로 맛있는 와인을 생산하던 곳이다. 미켈란젤로는 포도밭을 조카에게 맡겨 관리했는데, “셔츠 여덟 장 대신 와인 두 통을 보내다오”라고 편지에 쓸 정도로 그곳의 와인을 좋아했고 교황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 일을 되살려 니타르디는 매년 넥타르 데이라는 와인을 생산하고 그중 맨 처음 병입한 와인들은 바티칸으로 보내고 있다. 넥타르 데이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시라 등을 블렌드해 오크통과 병 속에서 3년간 숙성시킨 뒤 출시되는 프리미엄급 레드 와인이다. 과일 향이 풍성하고 커피, 감초, 마른 허브 등 복합미가 우아한 이 와인은 묵직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무척이나 매혹적이다.

펨퍼트에게 와인은 과연 어떤 존재일지 궁금했다. 와인을 예술품처럼 여기는 건 아닐까. 그의 대답에서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제가 독일인이어서 하는 말인데, 독일인은 먹는 것에 돈을 쓰지 않아요. 반대로 이탈리아인은 모든 돈을 먹는 것에 쓰죠(웃음). 좋은 먹거리에는 정당한 값어치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재료와 인간의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며 그는 농부 비르질리오를 떠올렸다. “그는 포도를 돌보며 단테의 ‘신곡’을 읊곤 했습니다. 우리 밭에서 50년 넘게 일한 분이었죠. 아름다운 시를 듣고 자란 포도는 맛있는 와인을 우리에게 내어줍니다.” 95세를 일기로 떠난 그를 추억하기 위해 펨퍼트는 와이너리 벽에 그의 이름을 새긴 동판을 붙였다.

정성을 다해 기른 포도로 만든 와인은 펨퍼트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다. 특히 카사노바 디 니타르디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밭은 한때 미켈란젤로의 사랑을 듬뿍 받던 곳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현시대 작가들이 그린 레이블과 포장지로 미켈란젤로를 기려야겠다고 생각했다. 1981년 이탈리아 화가 브루노 브루니를 시작으로 훈더트바서, 알랭 클레망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선정된 작가는 니타르디에 초대돼 한동안 포도밭과 와인 속에서 시간을 보낸 뒤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레이블과 포장지에 들어갈 그림을 그린다. 대가로는 돈 대신 와인을 받는다. 딱 한 사람 오노 요코만은 술을 마시지 않아 니타르디의 올리브오일을 받았다고 한다.

김창열 화백과 만남은 니타르디 와인을 수입하는 신동와인 김영호 회장의 주선이 계기였다. 펨퍼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제는 몇 병 남지 않은 카사노바 디 니타르디 2011년산을 시음했다. 이 와인은 이탈리아 토착 적포도인 산지오베제(Sangiovese)로 만든 정통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다. 좋은 와인은 숙성될수록 빛을 발하는 법. 11년 전에 생산됐음에도 와인은 전성기를 뽐내고 있었다. 잘 익은 베리의 감미로운 향이 서서히 올라오고 담배, 버섯, 가죽 등 숙성된 풍미가 기품을 더했다. 매끈한 질감은 우아하게 입안을 희롱했다. 2020년은 화가들의 작품을 레이블에 도입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니타르디는 전 세계 화가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공모했고, 그 결과 6명이 최종 선정됐다. 2020년산 와인 한 케이스는 그들이 그린 각기 다른 레이블의 카사노바 디 니타르디 6병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출시는 내년이지만 와인 애호가들은 아마도 수집할 생각에 벌써 마음이 급할 듯하다.

추천 화이트 와인 벤 와인병 이미지(왼쪽). 피터 펨퍼트 대표와 아내 스테파니아. 사진 신동와인
추천 화이트 와인 벤 와인병 이미지(왼쪽). 피터 펨퍼트 대표와 아내 스테파니아. 사진 신동와인

현재 니타르디 와이너리는 펨퍼트의 아들 레온이 맡아 운영 중이다. 철학 박사인 아들은 프랑스에서 와인을 공부하고 나파 밸리와 칠레에서 경험을 쌓았다. 총 32만㎡의 밭에서는 넥타르 데이와 카사노바 디 니타르디를 포함해 모두 6종의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그중 유일한 화이트 와인인 벤(Ben)도 마셔보기를 추천한다. 지중해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베르멘티노(Vermentino)로 만든 이 와인은 과일 향이 신선하고 맛이 부드러워 누구나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다. 

펨퍼트와 아내 스테파니아의 좌우명은 ‘Per Aspera Ad Astra’, 우리말로 ‘역경을 지나 별에 다다른다’는 뜻이다. 위대한 작품도 훌륭한 와인도 모두 힘든 과정을 겪고 태어나니 이 말이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다. 깊어 가는 가을 카사노바 디 니타르디를 음미하며 레이블 속 예술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