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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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감이 없지는 않지만 슬슬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시점이다. 코로나19로 인한 비상 상황에서도 체감하지 못했던 소비 축소를 요즘은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만큼 화제가 된 작품도 많지 않았던 한 해였다. 그런 가운데 선방한 작품이라면 단연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저주토끼’를 꼽을 수 있겠다. 드라마에 ‘오징어 게임’이 있다면 문학에는 ‘저주토끼’가 있다. ‘저주토끼’는 올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손꼽히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편에 오른 작품이다. 부커상 노미네이트와 함께 역주행한 덕분에 고요한 문학 출판 시장도 얼마간은 들썩였던 상반기였다. 

뒤늦게 ‘저주토끼’를 읽었다. 기이하고 으스스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한편의 잔혹동화 같은 단순함과 극적 전개가 있는가 하면, 소설을 다 읽은 뒤에도 좀처럼 헤어 나오기 힘든 복잡한 현실이 있었다. 사건의 전개는 우연적이고 초자연적인 상황이 거듭된다는 점에서 환상적인데, 그 환상적인 이야기가 상상된 자리는 더없이 현실적이다. 이런 잔혹동화에는 뿌리 깊은 갈등의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유구한 질문을 품고 있으며, 그 질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연령대, 전 세계를 관통한다. 그 보편성이 앞서 이야기한 기이하고 으스스한 정서에 있다. ‘저주토끼’가 부커상 최종 6편에 선정된 이유 역시 그 매력에서 기이한 것일 테다. 

‘자본주의의 리얼리즘’으로 알려진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는 그의 비평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에서 기이함과 으스스함이라는 개념으로 이 시대 공포의 정서를 구체화했다. 그에 따르면 “기이한 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무언가가 끼어든 것”으로, “미지의 힘에 대한 숨 막힐 듯하고 불가해한 공포심”을 의미한다. 한편 그는 장소의 으스스함, 텅 빈 풍광의 으스스함, 폐허의 으스스함 등 “인간 주체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빈 장소들에서 움직이는 것들”을 가리켜 으스스한 것이라고 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한 공포심, 인간의 의지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정서적 작용. 기이함과 으스스함은 마크 피셔가 장르문학을 읽어 내는 독법의 하나였지만, 극단적 자본주의가 인간 사회에 가하는 소외의 핵심을 읽어 내는 독법이기도 한 것이다. 

‘저주토끼’는 저주용품을 만드는 것이 가업인 집안을 배경으로, 할아버지에게 일어난 일을 손자가 듣는 액자식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저주용품이라고 하니 사악한 기운으로 들끓을 것 같지만 나름대로 사업을 운영하는 확고한 원칙이 있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용품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는 것. 하지만 딱 한 번,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저주용품을 만든다는 이유로 천민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할아버지에게 진실된 우정을 나누어 주었던 양조장집 아들, 즉 할아버지의 친구가 경쟁 업체의 야비하고 부당한, 한마디로 돈이면 뭐든 가능하다는 식의 훼방을 받아 사업이 망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는 친구를 죽게 한 경쟁 업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저주용품을 만든다.

기이한 것부터 말해 보자. 저주토끼가 경쟁 업체를 망가뜨리는 과정은 기이하다. 토끼들이 밤마다 공장에 가서 종이를 갉아대는 가운데 모든 문서가 사라진다. 회사의 자료들을 다 갉아버려 세금 납부를 증명할 길이 없어진 이들은 재산상의 손실을 볼 수밖에 없고, 이어지는 투자자들의 후폭풍 역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나아가 토끼는 그 업체 사장 손자의 영혼을 잠식해 죽게 하고 손자에 이어 사장의 아들을 다치게 하며 끝내 삼대를 멸하게 한다. 인간에게 벌어진 일이지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의 일이란 없다. 저주를 통해 가해지는 외부 힘은 기이하기만 하다. 

그리고 으스스한 것. 할아버지는 부당한 힘을 벌하는 차원에서 저주용품을 썼지만, 손자인 ‘나’의 눈에 그것은 조금 달리 보인다. 자기 집안이 저주토끼를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그로 인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건 바로 그 뒤틀린 세상 덕분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자본주의를 저주하지만, 그 저주마저 하나의 사업이자 또 다른 자본으로 기능하는 아이러니.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이 할아버지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인다. 망하는 것도 외부의 힘이고 흥하는 것도 외부의 힘이다.

화자가 이런 뒤틀린 세상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위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삼대가 망하는 극단의 저주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이유는 삼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두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궁극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뒤틀린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위안은 뒤틀린 세상이 끝나는 것뿐이라는 숨겨진 의미는 종말만이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를 두고 뒷맛이 쓴 결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완전한 종말을 통해서만 완전한 시작이 가능할 때도 있다.

‘취미는 데모’라는 정보라 작가가 최근 11년간 시간강사로 일했던 연세대를 상대로 퇴직금과 주휴·연차수당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는 뉴스를 봤다. 과연, 뒤틀린 세상을 완전하게 저주하는 작품을 쓴 창작자다운 행보다. 뒤틀린 세상에서 품을 수 있는 희망의 방향은 뒤틀린 것들이 사라지는 쪽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만큼은 끝이 하나의 미학이 아니라 일종의 이념으로 자리한다. ‘저주토끼’는 ‘끝에 진심인 작품’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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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사진 아작
사진 아작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인문학부 졸업 후 미국 예일대 러시아동유럽지역학 석사를 거쳐 이후 폴란드에서 어학연수 후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러시아 문학과 폴란드 문학에 대한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설 창작, 번역 작업, 대학에서 강의 등을 병행한다. 장편소설 ‘문이 열렸다’와 ‘죽은 자의 꿈’을 비롯해 정도경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단편집 ‘왕의 창녀’와 ‘씨앗’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독자들에게는 세상에 맞서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