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에 고향을 찾았다가 오랜만에 고향 집에 있는 내 어릴 적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모아둔 앨범을 들춰보았다.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옛 추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리움, 아쉬움, 아련함, 애틋함이 섞여 있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이 시공을 넘어 지금 여기로 사진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소환돼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사진과 함께 발견된 내 초등학교 시절의 만년필로 작성된 성적표도 발견했다. 중·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 학생증도 그곳에 있었지만, 그런 물건보다는 역시 사진이 던지는 감흥은 더욱 강렬했다. 대학 시절 학생증 속의 나는 약간 곱슬머리에 덥수룩한 장발을 하고 있었는데, 안경을 벗고 사진을 찍어 무척 어색했다. 그 시절만 해도 증명사진을 찍을 때는 안경을 벗는 게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지구촌 전역에서 사진으로 뭔가를 찍는 일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진의 90% 이상이 휴대전화로 촬영되고 있다고 한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보고, 공유한다. 예전에는 사진을 찍는 일은 일부 소수의 사람에 의한 독점적인 활동이었는데, 이제는 전 세계 80억 명에 달하는 사람 대다수가 이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필기를 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그냥 휴대전화로 한 컷 찍으면 그만이다. 박물관에서 전시품을 관람할 때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도, 식당에 가서 밥을 먹거나 카페에서 차를 마셔도 사진을 찍는다. 관광지에 가서도 소위 ‘인증샷’이나 ‘기념사진’을 남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열심히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기려는 사람은 무조건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선택과 집중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훨씬 더 즐기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물론 ‘셀카’나 소셜미디어(SNS)에 중독돼 본질을 망각하고 오직 사진을 찍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은 예외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지 않는다. 진짜 자신, 진정한 정체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 외관상 좀 더 멋있고 예쁘고 젊어 보이는 나를 찾아 헤맨다. 사진은 우리를 과거와 연결해주는 매개 고리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데도 도움을 주는 멋진 도구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진은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이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수단으로 변질해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사진을 찍는 것일까. 그냥 무료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기 위해서? 아니면 사진기자나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람처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예술적인 창작 활동의 일환으로 사진을 찍는 프로페셔널 사진작가들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사진을 찍는 카메라는 이제는 ‘제3의 눈’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사진을 찍는 과정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자신이 어떤 상황 속에서 경험한 것을 카메라 앵글에 담았다가, 인화지나 온라인상의 어떤 공간에다 유형의 형태로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자신이 아마추어냐 프로페셔널이냐를 막론하고 작가는 어떤 사물을 보고 ‘이거다!’ 하는 느낌이 드는 순간을 포착해낸다. 그렇게 포착된 순간을 그는 순식간에 자신만의 구도, 조명 등을 이용해 그 상황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내는 것이다.
사진작가 김경희는 최근 발간한 사진집 ‘쇠락 속에서(In Dilapidation)’에서 이렇게 말한다. “셔터의 누름은 이끌림의 순간이다. 이끌린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이유 모를 매혹당함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식이 정지된 상황이기도 하고, 비가시적인 무언가가 현존함을 느끼는 순간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나는 김경희의 이 말을 듣는 순간,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한 말이 생각났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뭔가를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보는 것(look at)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직관적으로 보는 것(see)이다.” 물론 김경희나 데이비드 소로나 다 같이 작가의 지나친 의도성, 자각성에 편중돼 사진을 찍지 말라는 소리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무의식성에는 사진을 찍는 이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분도 있을 것이고, 후천적으로는 평소 치열한 훈련의 결과가 몸에 내면화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두 사람 다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나 사물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물을 꼼꼼히 챙기는 것도 좋지만, 무의식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경희 작가는 이번에 출간한 사진집에 실린 사진 중에 엄선한 작품을 중심으로 10월 8일부터 서울 종로의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열고 있다. 나는 그녀의 사진집 속에 담긴 사진들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살펴봤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특별히 두 장의 사진에 내 시선이 계속 머무는 게 아닌가.
하나는 어느 재래시장 생선가게에 진열된 죽은 물고기 사이로 나비가 날아든 사진이었다. 어물전 진열대 위에는 조기, 고등어, 갈치 등의 각종 생선이 놓여 있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물고기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죽은 조기의 배 위에 어디선가 빨간 나비가 한 마리 날아와 앉아있는 게 아닌가. 나는 빨간 나비의 존재가 무척 궁금해 김경희 작가에게 물었다. 그녀의 답은 뜻밖이었다. 빨간 나비는 진열된 물고기를 향해 자꾸 꼬이는 파리떼를 쫓기 위해 만든 전기로 회전하는 파리채의 장식이었다.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파는 죽은 물고기를 향해 부나방처럼 모여드는 산 파리떼, 그것을 한사코 쫓아내는 인조, 그러니까 죽은 나비.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가 사진 한 장에 다 들어 있다. 다른 하나는 그냥 평범한 그릇에 담긴 과일을 찍은 것이었다. 그냥 어물전의 물고기처럼 어느 이름 모를 공간의 식탁 위에 사과와 레몬, 달걀, 마늘 등이 놓여 있는 심플한 사진이었다. 아직 이 과일이나 달걀은 살아있지만, 이내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 생명을 다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시들거나 썩어 없어질 것이다. 물고기와 나비 사진과 마찬가지로 이 한 장의 사진 속에도 생사의 역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김경희는 말한다. “낡아감과 늙어감은 사물과 사람에게 필연적이다. 죽음은 슬픔이자 고통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더욱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다가올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오늘의 삶 속의 생명력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김경희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지만 그 속에서도 긍정과 희망의 에너지를 찾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자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쇠락(衰落) 속에서도 말이다.
사진은 기억이고, 증거이자, 소중한 추억
김경희 같은 프로 작가들은 물론이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일반인들이 힐끗 무심코 지나쳐버릴 사물이나 순간들을 본능적으로, 직관적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의미 있게 해석해 한 장의 사진 작품으로 만들어 낸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우리가 사물을 더 주의 깊게 바라보게 만든다. 집중하게 만든다. 그냥 연기처럼 사라질 순간을 정지시킨다.
사람들이 저마다 동일한 사물을 바라보고, 동일한 순간을 지나가지만 그것을 카메라를 통해 포착하는 사람에게는 저마다 유일하고 독특한 개인만의 경험이다. 뭔가를 캐치해 의미를 부여하고, 새롭게 창조하려는 충동을 그들은 사진을 통해 풀어내는 것이다. 옛날, 사진이 나오기 전에 이런 말이 있었다. “그림은 천 마디 말의 가치가 있다.” 오늘날은 사진이 그림을 대체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마르틴 슈스터는 말한다. “사진은 기억이고, 증거이자, 소중한 추억이다.” 그렇다. 이 소중한 경험을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소중한 도구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 김진국
문화평론가, 고려대인문예술 과정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