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펏 박충열 대표. 사진 민학수 기자
크로스펏 박충열 대표. 사진 민학수 기자

“세계적인 퍼터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 100명이면 100명, 1000명이면 1000명 모두 반대했어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면서요.” 

현대차·기아의 디자인 개발을 이끌었던 박충열(58) 크로스펏(CROSSPUTT) 대표는 올해 평생 일궈온 디자인 회사 ‘이션 디자인’을 정리했다. 그는 자동차 엔진과 자동차 내외장 디자인 분야에서 현대차와 함께 많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던 이 분야의 대표적 전문가이다. 그런데 환갑을 앞둔 나이에 퍼터 및 관련 제품의 세계적 국산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며 무모해 보이는 도전에 나섰다. 

세계 퍼터 시장은 블루 오션이 아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미국)가 사용하는 타이틀리스트의 스카티 캐머런(60)과 ‘골프 여제’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과 박인비 등이 애용하는 캘러웨이 골프의 오디세이는 세계 퍼팅 시장의 강자다. 여기에 전통의 퍼터 명가 핑을 비롯해 테일러 메이드 등 세계 유수의 골프 브랜드가 내놓은 퍼터들도 골프용품 시장에서 더 많은 골퍼를 확보하기 위한 마케팅 전쟁을 벌이고 있다. 캐머런과 비슷한 고급 브랜드를 지향하는 이븐롤, 베티나르디 등 충성 고객을 확보한 곳도 있다. 

더는 끼어들 틈새가 잘 보이지 않는 시장이지만 박 대표는 퍼터를 중심으로 퍼팅 매트 등을 하나의 정체성을 갖는 ‘크로스펏 패밀리 룩’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퍼터를 제외한 모든 제품은 골프장이나 연습장에서 사용할 때까지 대부분 골프가방에 머무르지만, 퍼터는 사무실이나 집 어느 곳에서나 가벼운 마음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퍼팅 매트 등 퍼터와 관련된 제품들을 하나의 디자인 브랜드로 만들어 낸다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다.”

박 대표가 크로스펏을 처음 구상한 건 2012년으로 2년 후 첫 제품을 내놓았고 2015년 국내 골프공 브랜드인 볼빅과 협업으로 내놓은 제품이 국내 ‘굿디자인상’ 힌국디자인진흥원장상 우수상을 받으며 시장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퍼터 디자이너로 변신했을까? “어느 날 지인의 강권에 못 이겨 골프에 입문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빠져드는 묘한 매력이 있더라. 그러다 업(業)인 디자인 재능을 살려 직접 퍼터까지 만들게 된 거다.” 퍼터를 자르고 붙이는 등 수많은 시도를 하면서 터치감과 밸런스, 에이밍 등에 대해 연구했다. “자동차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3차원(3D) 조형이다. 사물을 볼 때 평면이 아닌 입체적 시각으로 분석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제품에 대한 이해도와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다.”

아마추어 골퍼들은 대개 골프를 즐기면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을 호쾌한 장타를 날릴 때를 꼽는다. 박 대표는 “그린에서 내가 상상한 대로 공이 굴러 홀에 쏙 빨려 들어갈 때 짜릿함을 느낀다”고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친구들이 네모반듯한 태극기를 그릴 때 그는 바람에 나부끼는 입체적인 태극기를 그렸다. 학창 시절에는 줄곧 미술학도를 꿈꿨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자동차 디자인의 매력에 빠졌다. 4학년 때 현대자동차 디자인 연구소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자동차 디자이너의 길을 걸었다. 20여 년 전에는 자동차 디자인 전문회사를 창업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는 올해 새 모델 ‘스텔스(Stealth) 2.0’을 내놓았다. 매년 1월 미국 올랜도에서 열리는 골프용품 박람회인 ‘PGA 머천다이즈 쇼(Merchandise Show)’에서 3년간 고객들의 요구를 반영해 만들었다. 그는 “적의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도록 만들어진 최첨단 전투기 스텔스기처럼 언제나 홀로 파고드는 퍼터를 모티브로 제작한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경쟁이 치열한 퍼터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크로스펏 제품. 사진 민학수 기자
경쟁이 치열한 퍼터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크로스펏 제품. 사진 민학수 기자

자동차 디자이너 출신인 그는 ‘디자인이 곧 기능’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골프 스윙에서 핵심 요소인 어드레스를 디자인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 특허 기술인 ‘듀얼 얼라이먼트 라인(Dual Alignment Line)’을 개발했다. 퍼터의 넥 부분에 있는, 사격 조준 가늠자 라인과 헤드에 있는 가늠쇠 라인을 일치시켜 눈 아래 수직선상에 볼이 위치할 수 있도록 해 퍼팅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스텔스 2.0 퍼터는 크로스펏의 이전 모델인 ‘포뮬러(FORMULA) 1.0’보다 20g 가벼운 555g(헤드 410g)으로 만들었다. 자체 개발한 그래파이트 샤프트를 사용해 원하는 색으로 마음껏 도장이 가능하면서 내구성도 좋아졌다. 박 대표는 “크로스펏은 기존 은색의 획일적인 색상에서 벗어나 젊은 감성과 골퍼들의 개성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그래파이트 샤프트의 생산원가가 다섯 배 더 들지만, 디자인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면서 강도도 스틸보다 강하게 만들 수 있어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헤드 디자인 바닥 부분(sole)은 평면으로 설계하여 토나 힐이 들리지 않도록 했다. 헤드 디자인도 바닥에 있는 공을 날개처럼 생긴 디자인을 통해 쉽게 집어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이 퍼터를 사용한다며 자신을 구력 30년에 70대 타수를 친다고 소개한 골퍼는 “내돈내산(내 돈 내고 내가 산) 퍼터인데 다른 건 몰라도 퍼터만큼은 잘하면 대한민국 브랜드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고 인터넷 제품 이용 후기에 글을 올렸다. 

그는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을 통한 독특한 판매 방식으로 국내 유통과 해외 진출의 장벽을 뚫고 있다. 크라우드 펀딩은 대중을 뜻하는 크라우드(crowd)와 자금 조달을 뜻하는 펀딩(funding)을 조합한 용어로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해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국내와 일본에선 이미 제품 판매가 이뤄지고 있고 미국과 대만은 진행 중이다. 박 대표는 최근 일본 바이어와 만났던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 퍼터를 수입한다고 하니 일본 골프 업계에서 깜짝 놀라더라는 이야기부터 일본에서도 젊은 골퍼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골프계의 반 고흐’라 불리는 퍼터 장인 스카티 캐머런은 차고에서 퍼터를 만들다가 거장이 됐다. 캐머런은 열한 살 때 중고 골프 가게에서 가죽 그립에 독특한 모델의 퍼터를 보고 매료된 뒤론 차고에서 아버지가 우드를 만들 때 그 옆에서 퍼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제조업 강국인 한국이 처음 자동차와 반도체, 조선 산업에 뛰어들었을 때 모두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했다. 세계적인 선수를 배출하고 뜨거운 골프 열기를 자랑하는 한국은 아직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국산 골프용품 브랜드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지금 당장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자동차 디자이너의 엉뚱한 도전에 눈길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