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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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자기 이야기’를 좋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 가운데 자기 인생에 대한 이야기에 가장 강한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무속인을 찾아가 뻔히 다 아는 자신의 과거사를 다시 듣고, 알 수 없는 미래를 점치고 싶어 한다. 그것도 남의 입으로, 확신에 찬 어조로. 이토록 오랜 시간 ‘무속’의 세계가 건재한 건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 아닐까. MBTI가 성행하는 것 역시 가시화된 유형으로 자신에 대해 말해 주는 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미 ‘자기 이야기’에 중독돼 있다. 

나도 ‘나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아무리 내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틈날 때마다 무속인을 찾아가거나 성격 유형 검사들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기엔 매일같이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거기에 마음껏 쓸 만큼의 돈도 없지만 무엇보다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인생을 맞추는 데에서 진지한 의미를 찾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대신 선택한 방법이 있다. 하루가 끝날 때, 내가 살았던 하루를 복기해 보며 나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루의 끝에 이르러 오늘 하루 벌어진 일을 되새김질하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고, 인생을 조금 더 풍요롭게 사는 아주 작은 기술이기도 하다. 아침에는 알 수 없었던 오늘을 알게 된 시점에서 지난 하루를 복기해 보는 사이, 점심 먹을 때 느꼈던 불안이 이해되고 알 수 없는 기대감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자기 인생의 서술자가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이 말하는 ‘나’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된다. 

‘엔딩노트’를 연재하는 동안 생긴 습관이기도 하지만, 책을 받아 들면 마지막 문장부터 읽은 다음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다짜고짜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읽어 나가다 끝에 ‘다시’ 이르면, 감흥 없었던 그 문장이 완전히 다른 색깔로 다가온다. 저자가 왜 이 문장으로 책을 맺었는지 알 것 같은 심정이 되며 책 내용이 다시 펼쳐지기도 한다. 보잘것없던 문장이 갑자기 근사한 옷을 입고 런웨이를 걸어 다니는 모습으로 뒤바뀌면 나는 런웨이 양쪽에 앉아 모델을 올려다보는 관객의 시선으로 문장이 주는 영감을 받는다. 해석할 수만 있다면 무의미한 끝은 없다. 

인생을 잘 산다는 건 하루를 잘 사는 것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이 책이 서점에서 이뤄지는 이웃들과 관계, 자기 자신과 관계를 다룬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조금 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합리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는 번아웃을 겪으며 인생을 방황하던 한 여성이 지금까지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다. 그 전환의 시점에 ‘휴남동 서점’이 있다. 휴남동 서점은 ‘쉴 휴(休)’라는 의미의 이름인 서점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여느 동네 서점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곳이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이 책이 일상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소박하고 따뜻한 책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는 완전히 반대의 생각을 품게 됐다. 이 책은 우리 일상에 결핍된 ‘비일상’적인 것들의 소중함을 자연스럽게 일깨워 준다. 그 비일상적인 것이란 바로 ‘좋은 대화’다. 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서점에 들어선 사람들이 나누는 ‘좋은 대화’다. 서점에서 만난 사람들은 일상에서의 감각과 구분되는 조금 다른 감각으로 대화를 이어 나간다. 자기 자신에 대해 곧장 말하지 않고 책을 매개로 이야기한다거나 책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매개물이 있거나 빗대어 이야기한다는 건 얼핏 자기 자신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것보다 전달력이 떨어질 것 같지만, 결과는 반대다. 은유와 비유로 말할 때 오히려 더 깊은 진실을 주고받을 수 있다. 누군가와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그 사람과 더 깊이 대화한다는 뜻이다. 

지난 주말, 정독도서관에서 준비한 작가와의 만남에 초대됐다. 황보름 작가와 함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그날 나눈 이야기 중에서 인상적인 내용도 바로 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대화를 잘 쓰기 위해 애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다와 구분되는 대화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점점 대화가 사라져 가는 세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이 전달될 것일 테다. 이 소설이 주는 힐링이란 대화라는 소통에서 오는 힐링에 다름 아니다. 

작가는 인생을 잘 보낸다는 것의 의미를 너무 거창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하루를 잘 보내는 것, 하루를 잘 보낸다는 것에도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타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은 좋은 대화를 나누는 것. 그러고 보면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좋은 대화를 하는 확실한 방법 아닐까. 책을 읽는 것은 이토록 불확실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좋은 하루를 그리고 좋은 인생을 사는 확실하고 단순한 방법일 것이다. 좋은 대화가 좋은 하루를 만든다. 좋은 하루는 좋은 인생이 된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Plus Point

황보름

사진 클레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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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LG전자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했다. 몇 번의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면서도 매일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잃지 않고 있다. 지은 책으로 ‘매일 읽겠습니다’ ‘난생처음 킥복싱’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 등의 에세이집이 있다. 첫 소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출간 이후 전업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