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중기의 대표적 변설가 소진(蘇秦)은 합종책(合縱策)으로 유명하다. 같은 시기 연횡계(連橫計)의 장의(張儀)와 함께 종횡가(縱橫家)로 꼽힌다. 그는 강성해진 서쪽의 진(秦)에 대항하려면 동쪽의 여섯 나라가 종적으로 연합해야 한다고 각국을 돌며 유세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혼자서 6국의 재상을 맡을 만큼 크게 출세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그는 많은 고초를 겪었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벼슬자리를 구했으나 여의치 못해 초라한 몰골로 고향에 돌아간 적도 있다. 그 낭패한 모습에 집안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베 짜던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와 맞아주지 않았고 형수는 밥도 해주지 않았다. 후일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내게 낙양성 밖의 밭 몇 뙈기만 있었어도 어찌 6국 재상의 직인을 허리에 찰 수 있었겠나!” 절박한 생활고의 우환 속에서 살길을 찾기 위해 분발한 끝에 마침내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다.
우환은 사람을 실의와 좌절 속에 빠져들게도 하지만,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학에서는 우환 그 자체가 창작의 가장 큰 요소가 되기도 한다. 중국 고전문학 중 후대의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수많은 명편은 대부분 우환 속에서 지어졌다. 굴원(屈原)과 두보(杜甫)의 작품들이 그 대표적 예로 꼽힌다. 특히 두보의 작품 속에는 개인의 곤궁함이나 사회와 국가의 위난에 대한 우환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많이 나타난다.
또한 남송(南宋)의 육유(陸遊)는 여진족(女眞族)에 빼앗긴 북방 영토의 수복을 염원하며 평생토록 우환의 나날을 보냈다. 정치적으로도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온 열정을 바쳤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로는 크게 역부족이었다. 만년에 그는 “죽기 전에 중원을 보지 못함이 한스럽다(死前恨不見中原)”라고 직설적으로 울분을 표출한 적도 있다. 그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시편은 다음과 같다. “죽으면 모든 일이 헛됨을 원래 알지만, 오직 아홉 주가 하나 됨을 보지 못해 슬프구나. 조정 대군이 북으로 중원을 평정한 날이 오면, 집안 제사 때 네 아비에게 잊지 말고 고하거라(死去元知萬事空, 但悲不見九州同. 王師北定中原日, 家祭無忘告乃翁).” ‘시아(示兒·아들에게 보임)’라는 제목의 유언과도 같은 이 작품은 분단 조국에 대한 시인의 우환이 얼마나 컸는지 잘 알려준다. 이런 까닭으로 그 이름 앞에 ‘애국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근심·걱정’을 뜻하는 ‘우환’이라는 말은 ‘역경’에 처음 보인다.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계사(繫辭)’라는 해설문에 “역을 지은 사람은 아마 우환이 있었을 것이다(作易者, 其有憂患乎)”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주 문왕(周文王)이 은(殷)의 감옥에 갇힌 우환 속에서 ‘역’을 지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환난을 겪은 뒤의 우환으로 괴로워하기보다는 미리 이를 염려해 만반의 대비를 해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만일의 위기 상황을 걱정하는 이러한 마음가짐을 흔히 ‘우환의식(憂患意識)’이라 한다. 평온한 상태에서도 언제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居安思危)으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이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를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작게는 가정이나 소기업에서 크게는 대기업이나 정부 기관 또는 국가 전체의 경영을 책임진 리더에게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다. 하물며 대중의 눈에도 위기의 조짐이 감지되는 상황에서 리더가 한가한 모습을 보인다면 곤란하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러한 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믿고 걱정할지언정,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애써 태평해서는 안 된다(寧可信其有, 不可信其無).”
‘시경’에 나오는 “미우주무(未雨綢繆·비 오기 전에 지붕을 고침)”라는 구절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전한(前漢) 초기의 제자백가서 ‘회남자(淮南子)’에는 “산 구름이 자욱하면 주춧돌이 축축해진다(山雲蒸, 柱礎潤)”는 구절이 있다. 위기의 전조 현상을 가리킨다. 여기서 “초윤지우(礎潤知雨·주춧돌이 축축해지면 비가 올 것을 미리 알 수 있음)”라는 숙어가 생겼다. 북송의 문장가 소순(蘇洵)은 ‘변간론(辨奸論)’에서 이를 원용해 “달무리가 지면 바람이 불고 주춧돌이 축축하면 비가 오는 이치를 사람들이 다 안다(月暈而風, 礎潤而雨, 人人知之)”라고 말했다. 당 말기의 시인 허혼(許渾)이 남긴 “산비가 오려 하니 바람이 누각에 가득하다(山雨欲來風滿樓)”는 시구도 위기상황의 임박을 예견할 때 많이 언급된다.
‘우환’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쓴 사람은 공자이지만 ‘우환의식’을 구체적으로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맹자(孟子)다. 그는 우환을 겪은 뒤에 크게 성공한 역사상의 여러 저명인사를 예로 들면서 “국가도 적국으로부터의 외환이 없다면 언제나 망한다(無敵國外患者國恆亡)”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환 속에서는 살아나지만, 안락 속에서는 죽는다(生於憂患, 而死於安樂)”고 경고한다. 수족관의 물고기를 장거리 운송할 때 죽는 경우가 많으나, 천적을 함께 넣어두면 생존율이 몇 배로 높아진다는 사례도 이러한 이치를 확인시켜 준다.
순자(荀子)는 이 도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즐거움은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데서 생기고, 우환은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데서 생긴다. 즐거움을 좇기 바빠 나라 다스림에 태만한 자는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자다. 그러므로 현명한 지도자는 반드시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린다. 그런 다음에는 온갖 즐거움이 그 속에서 얻어진다(百樂者, 生於治國者也. 憂患者, 生於亂國者也. 急逐樂而緩治國者, 非知樂者也. 故明君者, 必將先治其國, 然後百樂得其中).” 일시적 무사안일을 탐하다 나라를 그르치면 그 우환이 끝이 없지만, 먼저 나라를 잘 다스리면 그 평온함과 즐거움을 오래 향유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역사적으로 지도자가 우환의식을 망각하고 안일함을 좇는 데서 늘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순자도 이를 재삼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즐거워지려 하면 근심을 얻고, 편하려 하면 위기를 얻으며, 복을 구하려 하면 사망을 얻는다”고 부연한다.
우환의식에 대한 이와 같은 성찰은 북송(北宋)의 명신 범중엄(范仲淹)이 쓴 ‘악양루기(岳陽樓記)’라는 문장에서 다음의 명구로 다듬어진다. “세상 사람들이 근심하기 전에 먼저 근심하고,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한 다음에야 즐긴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모든 분야의 지도자들이 뼛속 깊이 새겨두어야 할 잠언이다.
걱정이 지나치게 많으면 우울증이 생기는 등 부작용도 있지만, 너무 걱정 없이 무사태평으로 안일하고 나태하게 지내는 것도 큰 문제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대혼란의 위기 상황이다. 코로나19 후유증으로 빚어진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 그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의 악재로 국내외의 정세가 그저 암담하기만 하다. 이와 같이 심각한 사태가 도래하리라고는 예지력이 뛰어난 극소수의 전문가 말고는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는 헤아리지 못한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듯이 사람에게도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화와 복이 있게(天有不測風雲, 人有旦夕禍福) 마련이다. 개인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뜻하지 않은 우환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세상사다. 언제 어느 분야에 어떤 형태의 위기가 닥칠지 모르므로 모두가 늘 긴장된 마음으로 대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공적인 책임을 맡은 인사들에게는 우환의식이 각별히 요구된다. 깊은 우환의식으로 우환에 대한 만반의 태세를 갖추지 않고 ‘유한(有閑)’하게 일시적 즐거움으로 세월을 보낸다면 불시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모두가 고통을 당하게 됨은 자명한 이치다.
이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에 중차대한 지위에 있는 당사자들이 대중의 우환과는 반대로 한가한 언동을 보여 뜻있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20여 년 전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사태의 전후 정황과 뼈저린 교훈을 까마득히 잊은 듯하다.
▒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