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스 카네티(1905~94)는 198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이자 소설가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에 두루 능통한 통섭형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 초반에 나온 그의 저서 ‘군중과 권력’을 통해서였다. 카네티가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한 이 책은 군중의 실체에 대한 빛나는 통찰로 가득하다.
1980년대는 전두환 군사 독재에 대한 반대 시위로 해가 뜨고 해가 지던 시절이다. 특히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터지고 연이어 이한열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세상을 뜨면서, 군사 정권에 대한 국민의 감정은 폭발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지속되던 반정부시위는 양복을 입은 직장인까지 합세하는 대규모 시위로 변했다.
나처럼 굳이 심리학 전공자가 아니라도,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이런 대규모 시위에 참가하면서 혹은 이를 지켜보면서 도대체 군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증을 한번쯤은 가졌을 것이다. 나의 경우 1987년 10월 어느 날의 경험이 군중이라는 주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
1987년 10월 25월. 민주쟁취청년학생공동위원회라는 다소 긴 이름의 단체가 자신들의 창립 대회를 고려대 운동장에서 하기로 하고, 김영삼(YS)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대중(DJ) 평화민주당 총재를 연사로 초청했다. 그날 고려대 운동장에는 10만 명이 운집했다. YS와 DJ 지지자들은 물론이고, 군사 정권의 종식을 갈망하는 많은 시민이 모인 것이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연설 한마디 한마디가 터져 나올 때마다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지르고 손뼉을 쳤다. 그것은 두 사람에 대한 지지이기도 했지만,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의 ‘타는 목마름’이기도 했다. 10만 군중이 외치는 소리는 어마어마했다. 지축이 흔들리고 천지가 진동했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10만 명이 이 정도인데 100만 명이 동시에 외친다면 어떨까. 역사서에나 나오는 100만 대군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리하여 그들이 동시에 고함을 지르며 십 리 밖에서도 들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진격해 온다면 말이다. 그 소리를 적군이 멀리서 듣는다면 아마도 그들은 오줌을 찔끔거리며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경험은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로 상징됐던 응원 군중의 열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또 한 번의 군중 체험은 몇 년 전 여의도불꽃놀이 현장에서였다. 내가 사는 곳이 서울 이촌동 한강공원 근처여서 여의도를 제외하고는 불꽃놀이를 관람하기 좋은 장소로 꼽힌다. 그날 저녁 아내와 나는 체육복 차림으로 동네 마실 가는 기분으로 터널을 지나 공원 입구로 진입했다. 그 순간 우리는 깜짝 놀랐다. 초고밀도를 자랑하는 듯한 거대한 군중의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밀렸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내 몸은 군중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갇혀 출렁거렸다. 우리는 언제 난파될지 모르는 일엽편주(一葉片舟)였다. 공원은 입구부터 버려진 음식 쓰레기와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강변북로를 불법 점거한 구경꾼 자동차의 경적 등으로 가득했다. 그것들을 멀리서 터지는 휘황찬란한 불꽃과 천둥소리를 방불케 하는 폭죽 소리가 묻어버리고 있었다.
군중의 밀고 당김 속에 불가피하게 아내와 떨어지게 된 나는 황급히 현장을 떠야겠다고 판단했다. 이러다가 잘못되면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휴대전화는 터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100만 명가량의 관중이, 여의도와 이촌동 인근에만 이미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우리 부부는 연락을 포기하고 겨우겨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공원 입구에만 들어섰는데, 빠져나오기까지 무려 한 시간은 걸렸던 것 같다. 그 순간 누군가 다른 못된 마음을 먹고 밀치거나 난동을 피우기라도 했다면, 무슨 사달이 났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군중의 탈개인화
카네티에 의하면 군중은 그 무리가 증식(增殖)되기를 원한다. 군중은 서로 밀도가 높아지는 것을 좋아한다. 적막강산처럼 한적한 곳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려는 사람은 없다. 봄 벚꽃놀이나 가을 단풍놀이 시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몰리고, 도로에 차가 밀려 마비될 정도라는 것을 알아도 사람들은 굳이 길을 나선다. 군중은 그 수가 계속 늘어나고, 밀도가 높아지기를 바라는 속성이 있다는 말이다.
카네티에 의하면 군중의 내부에는 평등이 존재한다. 군중 속의 개인은 이제는 더 이상의 인격체로 작용하지 못한다.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가 아무리 높다고 한들 군중 속에서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집단심리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이것을 군중의 탈개인화(deindividuation)라고 한다. 집단 속의 사람들은 개인적 정체성을 잃고, 평소 가치관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다.
군중 속으로 들어가기 전의 개인은 대개는 성숙한 시민으로서 정체성(citizenship)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인 역할을 잘 수행하는 인격체(personality)다. 하지만 일단 군중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순간 나는 지금까지의 나가 아니다. 탈개인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군중의 수가 극도로 늘어나고 초고밀도가 되면 이제는 탈개인화를 넘어서 나는 군중이라는 비인격체의 부품이 된다. 내가 사회에서 재벌 총수든, 노숙자든, IQ가 높든 낮든, 아무 소용없다. 용케 군중 속에서 탈출하지 않는 이상 군중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최고도로 증식하고 밀집도도 높은 무리는 일종의 거대한 공룡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공룡의 옆구리를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쑤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통증과 분노에 빠진 공룡은 길길이 날뛸 것이다. 공룡 주변에 있는 것 중 성한 것은 없을 것이다. 공룡 자신 또한 심각한 외상을 입고 중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군중 속의 개개인은 공룡의 발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카네티에 의하면 기존의 억압에 대항하여 혁명적인 방식으로 봉기하는 군중을 ‘역전(逆轉) 군중’이라고 한다. 이들은 동일한 목표와 방향성이 있고, 그 목표를 달성하면 소멸된다. 하지만 ‘축제 군중’은 다르다. 축제 군중은 목표의식도 방향성도 없다. 다만 축제 기간에 그 장소에서 금기가 풀어지고 이완과 방종과 향락이 허용되며, 풍성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향유할 뿐이다.
축제 군중 중에서 경기장이나 공연장처럼 무리의 증식이 제한되는 ‘닫힌 군중’도 사고 나기 쉽다. 하물며 불꽃놀이 축제나 핼러윈 축제처럼 무리의 증식에 제한이 없는 ‘열린 군중’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다. 성난 공룡 같은 비인격적 존재라는 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군중 사이에서 쇠꼬챙이에 옆구리를 찔린 공룡 같은 돌발 상황이라도 일어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군중이 어떻게 치명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취재한 저널리스트 에밀리 배저는 이렇게 말한다. “군중 참사의 원인은 인간 심리가 아니라 물리학적 현상이 원인이다!” 이 말은 멀쩡한 개인도 군중 속에 섞이게 되면 무기력하게 탈개인화하기 쉽고, 그 군중의 규모가 커지고 밀도가 높아지면 공룡 같은 비인격체와 다름없어진다는 말이다. 비인격체에게 성숙한 인격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화가 나 폭발해버린 헐크에게 논리학을 강의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군중 압사, 군중 난기류 같은 현상은 선진국, 후진국의 문제가 아니다. 군중은 인격이 살아 있는 성숙한 시민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군중 사고는 언제고 어느 나라에서건 일어날 수 있다. 일단 일어나면 수습은 불가능하다. 오직 예방밖에는 대책이 없다. 특히 코로나19나 경제 불황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억눌리고 통제돼 있는 시민이 자칫 그 스트레스나 불만을 해소할 배출구를 찾지 못하고 대규모로 모일 때, 군중 사고의 가능성은 더 커진다. 당국의 치밀하고 체계적인 연구와 재발 방지 대책이 시급하고 중요한 이유다. 군중은 물리적이지만, 그 예방 대책의 수립은 심리적인 고려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김진국
문화평론가, 고려대인문예술 과정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