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파리 정치대 정치학,현 코렐리아 캐피털 사장,전 프랑스 통상관광국무장관· 디지털경제부 장관,전 프랑스 경영전략 연구소 이사 사진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파리 정치대 정치학,현 코렐리아 캐피털 사장,전 프랑스 통상관광국무장관· 디지털경제부 장관,전 프랑스 경영전략 연구소 이사 사진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플뢰르 펠르랭의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의 첫 문장은 “나는 1974년 3월 1일 프랑스의 르부르제 공항 라운지에서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그날은 생후 6개월 된 한국 아기가 프랑스에 처음 도착한 날이다. 프랑스인 어머니의 가슴에 처음 안긴 날은 눈이 내렸고,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에게 ‘도착했다’는 ‘태어났다’와 동의어가 됐다. 그리고 펠르랭은 40년이 지난 2013년, 프랑스의 디지털경제부 장관이 돼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고아로 떠났다 장관으로 돌아온’ 그를 한국 신문은 자랑스러운 ‘국민의 딸’로 대서특필했다. 기자들은 기대에 찬 얼굴로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당신은 한국인이라고 느낍니까? 프랑스인이라고 느낍니까?”라는 질문에 펠르랭은 “나는 뼛속까지 프랑스인입니다”라고 답했다. 

성공한 모든 이를 핏줄로 엮고 싶어 하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흔드는 그의 쇼맨십 없는 대답은 과거를 잊은 우리의 무례를 일깨웠다. 2016년 공직에서 물러난 뒤 네이버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투자회사 ‘코렐리아캐피털’ 대표로 변신한 펠르랭의 행보를 나는 멀리서나마 지켜봤다. 한국과 프랑스의 경계를 뛰어넘듯 공공과 민간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점프하며 사는 그 꿋꿋한 균형 감각은 어디서 오는 걸까. 

플뢰르 펠르랭을 만났다. 그가 버려졌던 망원동 317번지는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사진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사진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나는 뼛속까지 프랑스인’이라던 당신의 과거 발언을 기억한다. 이번 책(‘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의 가제는 ‘마음은 한국인’이었다)은 오해를 풀기 위한 세심한 편지 같았다.
“(미소 지으며) 그 워딩을 기억한다. 그때는 내 속마음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이제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소속된 사람으로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다.”

‘부모와 내가 만나 서로의 결핍을 채웠다’고. 놀라운 자의식이다.
“자의식 이면의 무의식에는 부모가 채워줄 수 없는 근본적 결핍이 있었다. 되돌려보내질 수 있다는 공포감이다. 입양아들은 쫓겨나지 않기 위해, 가족과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에너지를 다 짜내서 쓴다. 지금의 나는 인정받기 위해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안정된 뿌리, 평화, 밸런스를 찾았다. 그래서 20~30대보다는 지금이 더 좋다.”

어떤 환경에서든 ‘오염 서사(결국 비참해질 거야)’가 아닌 ‘구원 서사(결국 잘될 거야)’를 선택했기에, 당신의 스토리는 보통 사람에게 영감을 준다. ‘구원 서사’의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됐나.
“어머니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에게 ‘얘는 특별한 사람이 될 운명이야’라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의 서사에서 나는 ‘생존자’였고, 항상 동화 같은 해피 엔딩의 분위기를 느꼈다. 나와 비슷한 서사로 시작해서 어두운 과정을 겪는 입양인들도 많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시작점과 화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백인으로 느꼈다는 고백에 놀랐다.
“어머니는 ‘너는 내 몸이고 내가 낳은 것 같은 딸이야’라고 하셨고, 나는 자신을 백인으로 인식했다. 거울을 봐야 다르다는 걸 알았다. 프랑스 사회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산다. 지하철에 앉아있으면 북아프리카인과 백인들이 섞여 있다. 사실 프랑스 사회는 이민자가 많아서 대놓고 차별하진 않는다. 오히려 인도나 차이나(중국)에서 온 이민자들은 지식인이 많았고, 아시아인은 근면하다는 긍정 평가도 많았다. 어찌 보면 나 또한 ‘다른 얼굴’을 갖고 있었기에, 이른 나이에 공직에 등용될 수 있었다.”

플뢰르 펠르랭은 엘리트 코스인 에섹 경영대학, 파리 정치대학, 국립 행정학교를 나왔다. 감사원을 거쳐 2012년, 사회당의 올랑드가 엘리제궁에 입성한 뒤, 그는 디지털경제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17명의 남성과 17명의 여성, 역사상 최초로 완벽한 성평등을 이룬 내각이었고 선출직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펠르랭이 유일했다.

다양성과 양성평등이라는 정치적 과제와 잘 맞아 장관직에 발탁됐지만, 정치 생태계는 생각보다 거칠었다. 한 주간지는 그에게 ‘게이샤’라는 성차별과 외국인 혐오 표현을 쓰기도 했다.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했고, 계속해서 실력과 실적으로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고 했다.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사진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사진 장련성 조선일보 기자

4년 동안 장관으로서 어떤 정책을 펼쳐나갔나.
“디지털경제부 장관을 할 때는 넓은 범위의 프랑스 테크 활성화를 위해서 일했다. 휴대 전화 4G, 디지털 파이낸싱, 세금 제재 완화 등을 직접 결정했다. 미·중의 기술 패권을 앞설 수는 없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스타트업 연합군이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일이 있었다. 2015년 문화부 장관을 할 때는 풍자 신문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범의 공격을 당했다. 많은 목숨이 희생되고 애도의 시간을 보냈다. 즐거운 시간도 많았다. 하지만 정치인은 그 가족까지 24시간 노출이 되어 있어서, 일을 정말 좋아해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다. 그 점에서 나는 모든 정치인을 존경한다.”

당신이 겪은 계급 충돌, 가면 증후군, 계층 이탈자 같은 감정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나. 당신은 피와 피부색과 계층이라는 너무 많은 허들을 뛰어넘었다.
“사실은 피부색보다 계층의 차이가 더 충격적이었다. 특정 사회·문화로 이동하면서 나는 가족과 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와 비슷한 가난한 집 출신의 프랑스인도, 사회·문화적 계급이 올라가면서 집안을 배신한다는 감정이 든다. 부모님은 나의 성공을 응원하고 자랑스러워하지만, 점점 나는 그분들과 내가 좋아하는 책, 오페라, 클래식 등 지적인 고급 문화를 공유할 수 없어진다. 관계가 한정되는 슬픔이랄까.”

자유, 평등, 박애를 정치적 유산으로 갖고 있는 톨레랑스의 나라지만, 프랑스 사회는 어쩌면 더 계급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가.
“맞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그랑제콜은 한국의 수능 시험 경쟁보다 치열하다. 고등학교에서 어떤 계열을 선택하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시험을 준비하는지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학생은 최적의 선택을 하기 힘들다. 출신 계층에 따라 출발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서울대,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특권 계층 출신들이 많은 것과 유사하다. 그랑제콜 학생들도 대부분 좋은 집안 출신들이다. 그렇지 않은 환경 출신들은 더 큰 노력을 해야 한다. 보수적인 벽을 넘기 어렵다.”

계층 이동에 대한 어려움은 한국의 젊은이들도 겪고 있다. 금수저, 흙수저 논쟁에 세습 중산층 사회가 심화되고 있다. 해법이 있을까.
“프랑스에서도 실버 스푼이라는 표현이 있다. 도심 외곽이나 빈곤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백인 프랑스인과 같은 기회를 가질 수 없다. 그 문제로 열띤 토론을 하지만, 한 방의 해결책은 없다. 학교 시스템, 사회 보조금, 이민 정책 등등⋯, 동등한 실력에 동등한 기회를 줄 방법이 없을까. 영국, 프랑스도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21세기 클럽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빈곤층 출신의 뛰어난 아이들에게 멘토링을 해왔다. 차별이 일어나는 위기의 순간을 감지하고, 유리 천장을 깰 수 있도록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한다.”

당신 인생에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이었나.
“계급을 이탈하는 과정에서 내 성격이 형성됐다. 내 내면은 다양한 허들의 칵테일이다. 부정적으로 몰아가면 경계성 인격 장애 상태가 됐을 거다. 하지만 나는 이런 복잡성을 나의 장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라 간의 이동, 인종 간의 이동, 계층 간의 이동….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몰랐을 일들이다.”

장관 펠르랭에서 벤처캐피털 대표로의 펠르랭, 그 변화는 만족스러운가.
“장관일 때는 정책 로드맵과 재원이 매우 어렵고 복잡했다. 아시아인 외모의 젊은 여성으로서, 나는 좀 더 새롭고 현대적이면서 정직한 정치 스타일을 구현했다. 때때로 정책 그 자체보다 동료의 모함이나 가십에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민간으로 돌아와서는 훨씬 자유로워졌다. 벤처캐피털을 설립한 이후 새로운 생태계와 새로운 만남에 눈을 떴다. 디지털경제부 장관으로 일할 때와 분야는 비슷하지만, 지적 호기심을 따라 신나게 일하고 있다. 앞으로 유럽과 프랑스 회사가 한국에 잘 투자하도록 그리고 한국의 기업이 유럽에 잘 안착하도록 돕고 싶다.”

이제야 제대로 한국과 프랑스의 가교가 된 느낌이라고 했다. 가교가 당신 인생의 결정적 키워드로군!
“맞다. 장관 시절에도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일에 함께했다.”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 어느 쪽을 더 좋아하나.
“그 둘을 잇는 여정을 좋아한다. 영화 ‘괴물’을 보면 양궁선수로 나오는 배두나가 시합에 나가면 항상 2등을 한다. 실망해도 또 과녁 앞에서 활을 당기고 조준한다. 영화 후반부에 가서 결정적 순간에 명중시킨다. 성공은 실력과 운의 칵테일이다. 언제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잘될 때나 안될 때나 그 여정을 함께하는 친구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친구가 있으면 즐길 수 있다.”

‘내가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과거는 나를 생각한다’라는 깨달음은 더 깊어졌나.
“물론. 과거가 나를 생각한 덕분에 내겐 가족처럼 소중한 한국 친구들이 생겼다. 그게 내 인생의 럭셔리다.”

당신이 버려졌던 그곳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317번지’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나.
“그 주소를 네이버에 맵에 검색했더니, 존재하지 않는 주소로 나왔다. 얼마 전 성지 순례하듯 들뜬 마음으로 그 주변을 방문했다. 핫플레이스로 둘러싸인 세련된 동네에서 친구와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다. 특별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 주소는 현실에도 내 내면에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