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산 에라르 피아노. 사진 위키피디아
1791년산 에라르 피아노. 사진 위키피디아

약 8년 전 필자가 아직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에서 일할 때였다. 당시 한 피아노과 동료가 꽤 상기된 목소리로 필자에게 외치듯 말했다. “내가 그렇게 꿈에 그리던 피아노를 샀어! 맞춰 볼래? 바로 에라르야! 그런데 어디서 샀는지 알면 더 놀랄걸? 이베이에서 경매로 그것도 단돈 1500유로(약 208만원)에 샀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에라르야 19세기를 풍미했던 프랑스 피아노 메이커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통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달하는 그랜드 피아노를 그것도 100년이 족히 넘은 피아노를 1500유로에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샀다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피아노는 며칠 뒤에 함부르크대학 음대 동료 연구실에 도착한다고 했다.

궁금했다. 이 피아노가 과연 그 옛 세기의 영광을 재현할 만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보물 같은 악기일지 아니면 인터넷에서 안타깝게 속아서 사, 안 그래도 추운 독일 함부르크 겨울 날씨에 땔감으로 쓸 만한 나무 장작더미일지 말이다.


1855년산 에라르 피아노. 사진 위키피디아
1855년산 에라르 피아노. 사진 위키피디아
1907년산 에라르 피아노. 사진 위키피디아
1907년산 에라르 피아노. 사진 위키피디아

며칠 뒤 동료 연구실을 찾아갔다. 에라르 특유의 밝은 나무 빛을 띤 한 피아노가 연구실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앞에서 보니 멋들어지게 음각으로 새겨진 에라르 회사 로고도 건반 위에 밝게 빛나고 있었다. 피아노 건반을 눌러봤다. 물론 조율도, 조정도 해야 하는 등 한두 군데 손볼 피아노는 아니었지만, 담백하면서도 밝은 소리가 악기 특유의 오리지널리티를 아직 잃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이후 전문 복원 업체에 악기를 맡겨 악기의 컨디션 또한 상당히 좋아진 것을 동료와 함께 지켜봤다.

20세기부터 현재까지는 공연장 대부분이 독일 함부르크 또는 미국 뉴욕에서 생산된 스타인웨이(Steinway) 그랜드 피아노를 사용한다. 19세기를 풍미했던 피아노 중 하나를 꼽자면(물론 여러 훌륭한 피아노 메이커가 많았지만) 단연코 프랑스 메이커 에라르였다. 에라르는 창업자 세바스티앵 에라르(Sébastien Érard)의 성을 따서 프랑스 파리에서 생산된 피아노 메이커다. 지금이야 일부 피아노 수집가, 음악 마니아 등에게 알려진 정도지만, 한창 피아노가 생산됐던 19세기 에라르의 명성은 대단했다. 하이든, 베토벤 등의 고전주의 작곡가뿐 아니라 이후 낭만주의 시대의 멘델스존, 리스트, 슈만 그리고 이후 인상주의 시대의 드뷔시, 라벨 등 19세기를 거쳐 간 거의 모든 이가 에라르 피아노를 애용했거나 적어도 널리 연주했다고 한다. 유럽 출신 피아니스트가 미국에 콘서트 투어를 갈 때도 배 화물로 싣는 품목 1호가 에라르 피아노였다. 연주자가 투어를 마치고 유럽으로 귀국하기 직전에 비싼 가격에 팔기도 했고, 또 반대로 미국 출신의 피아니스트가 유럽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때 잊지 않고 구매한 악기이기도 했다.

창업자 세바스티앵 에라르는 1752년 당시 독일어권 알자스 지방(현재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가구 제작자인 아버지의 공방에서 일을 도우며 손재주를 익혔을 뿐만 아니라 실용기하학과 설계 도면 제작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프랑스 파리로 옮겨가 그곳에 자리한 한 하프시코드 공방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탁월한 악기 제작 실력은 금세 그를 지도하던 공방의 명장 수준을 넘어섰고 파리 음악계에 소문이 나 자신의 공방을 차려 악기 제작을 이어 갔다고 한다. 이후 왕실에도 그의 악기가 소개돼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에라르의 피아노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렇게 그는 왕실에 악기를 납품하는 최고의 영예를 갖게 됐다.

1789년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발발했다. 프랑스 왕실과 각별한 사이였던 그는 안위를 걱정해 이웃 나라 영국 런던으로 피신해 공방을 열었다. 그곳에서 계속해서 성공을 이어 나갔다. 이후 혁명의 소용돌이가 잦아들자 파리로 돌아가 다시 피아노를 생산했으며, 조카 피에르 에라르가 사업을 이어받아 유럽 최고의 프랑스 피아노 메이커로 자리매김했다.

이토록 에라르 피아노가 유명해진 데는 특유의 오리지널리티가 담긴 아름다운 소리도 있지만 바로 에라르가 발명한 피아노 건반의 ‘이중 이탈 장치’에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손으로 누르는 건반에서 현까지 이어진 긴 나무 건반 액션에 탄력적으로 꺾일 수 있는 관절 같은 장치를 고안했다. 연주자가 음을 누르자마자 나무 액션이 꺾여 금세 본 위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장치의 발명은 당시 피아노 제작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피아노를 통한 표현의 차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를 필두로 낭만주의의 비르투오시즘이 주목받을 당시 초인적인 기교를 선보이기를 원했던 피아니스트, 예를 들어 리스트가 피아노에 표현하고자 한 극도로 빠른 패시지, 연타 등이 이 장치를 통해 실현 가능해졌다.

이중 이탈 장치는 이후 스타인웨이가 계승해 현대 피아노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 장치가 없다면 아마 리스트를 포함한 많은 기교적인 작품을 비롯해 인상주의 시대 작곡가 모리스 라벨 작품의 ‘스카르보’ ‘알보라다 델 그라시오소’ 등 아주 작고 빠른 연타 등의 섬세한 표현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19세기를 풍미한 에라르는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이웃 나라 독일의 스타인웨이 피아노에 주도권을 내어주고 이후 최소한의 명맥만을 유지해오다 2013년쯤 안타깝게도 200여 년에 걸친 피아노 생산의 전통을 마무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에라르 피아노가 점차 각광받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19세기 피아노 메이커 플레이엘을 비롯해 18세기의 포르테 피아노 메이커였던 발터, 슈타인 그리고 그래프의 포르테 피아노 등이 주목받고 있다. 당시 쓰인 작품을 현대 피아노로 연주하고 감상하는 것이 현대에 일반적이지만, 당시 시대 소리의 미학이 가미된 오리지널리티를 좀 더 음미하고 싶은 수요가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일례로 2018년에는 세계적인 피아노 콩쿠르인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쇼팽 시대인 19세기 악기만을 대상으로 연주 경연을 열기도 했다. 마에네(Maene), 폴 맥널티(Paul McNulty) 등 18세기 포르테 피아노와 19세기 피아노를 수리·제작하는 공방이 각광을 받고 전문 연주자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



▒ 안종도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연주학 박사, 전 함부르크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쇼팽과 그 시대 작곡가들의 피아노 작품집
(Chopin & his contemporaries - 
Played on Pleyel & Erard Pianofortes)
연주자 바트 반 오르트(Bart van Oort)


쇼팽과 동시대 작곡가인 존 필드, 프란츠 리스트 등의 피아노 작품을 에라르 피아노 및 에라르의 경쟁사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엘 피아노로 들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음반이다. 현재 포르테 피아노 연주 권위자로 평가받는 바트 반 오르트의 연주로 소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