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진집 ‘X=Y I·den·ti·ties’의 표지. 2, 3, 4 책에는 작가인 루카스 버크(Lukas Birk)가 전 세계의 다양한 신분증에 자신의 얼굴을 합성하고, 일부 텍스트 정보를 변형한 가짜 신분증들이 담겨 있다. 사진 김진영
1 사진집 ‘X=Y I·den·ti·ties’의 표지. 2, 3, 4 책에는 작가인 루카스 버크(Lukas Birk)가 전 세계의 다양한 신분증에 자신의 얼굴을 합성하고, 일부 텍스트 정보를 변형한 가짜 신분증들이 담겨 있다. 사진 김진영

서점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책을 선별하는 일이다. 한 해에 발간되는 수많은 책 중 어떤 책을 손님들에게 소개할 것인지 고르기 위해 출판사가 제공하는 정보나 작가의 인터뷰 등 많은 자료를 찾아본다. 가장 도움이 되는 건 두말 할 것 없이 책을 직접 보고 펼치는 것이다.

사진집을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북페어에 가는 것이다. 수많은 출판사와 작가가 출판물을 가지고 부스 형태로 참여하는 북페어는 한 장소에서 수많은 책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웹상에서 이미지로 볼 때와는 달리 인쇄된 종이를 넘기며 책의 매력을 발견하고 출판사나 작가가 직접 책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보석 같은 책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해, 파리 센 강의 배 위에서 열리는 북페어 폴리카피(polycopies)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한 부스에서 책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지갑을 발견했다. 신분증 플라스틱 카드가 여러 개 꽂혀 있는 검은색 가죽 지갑이었다. “누가 지갑을 두고 가신 것 같아요.” 지갑을 주워 부스에 계신 분에게 내밀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거 책이에요.”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자 내가 집은 물건이 지갑이 아니라 이미지가 인쇄돼 있는 책이라는 점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된 다양한 신분증 이미지들이 담겨 있었다. 파키스탄, 홍콩의 주민등록증이나 한국의 운전면허증 등 국가가 발급한 신분증부터 언론사 소속임을 입증하는 프레스 카드, 학생 신분임을 보여주는 학생증, 그 밖에도 특정 교구 소속 종교인임을 보여주는 카드나 병원 관계자임을 보여주는 신분증도 있었다.

다양한 신분증 이미지를 수집해 만든 책인 걸까. 신분증 속 인물들은 얼핏 볼 때 모두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자 곧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염, 안경, 모자 같은 위장 전술을 쓰거나 얼굴의 각도 혹은 사진의 노출 등 촬영 방식의 차이를 통해 다른 사람인 척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 이 모든 신분증 사진들이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부스를 지키고 있던 인물이자 이 책의 작가인 루카스 버크(Lukas Birk)였다. 책 속 사진들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나는 닮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신이군요.”

‘X=Y I·den·ti·ties(Fraglich Publishing, 2019)’는 루카스 버크가 웹에서 전 세계의 다양한 신분증 이미지를 수집한 뒤 자기 얼굴을 합성하고 일부 텍스트 정보를 변형하는 방식으로 작업한 결과물을 담은 책이다. 책에 담긴 플라스틱 카드가 실제 신분증 카드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터라 흥미롭게 들여다보자,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이 가짜 플라스틱 카드가 효력이 있는지 테스트해 보았는데, 어디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말인즉슨, 이 카드를 내밀면 상대는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하지 않고 신분증의 효력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신분증 카드는 한 국가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사용된다. 우리는 국제학생증이나 국제면허증 등 해외에서도 효력이 인정되는 신분증 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하곤 한다. 이러한 카드에는 의미를 전달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텍스트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진이다. 이 두 가지 의미 전달 요소가 개인을 식별하는 행위를 도와준다.

우선 텍스트를 통해 우리는 신분증을 발급할 수 있는 권위를 지녔다고 판단되는 국가나 단체명을 파악하고, 사람의 이름을 확인한다. 그런데 텍스트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누군가가 사진이 없이 글자만 적혀 있는 신분증을 들고 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우리는 쉽게 믿을 수 있을까? 텍스트는 실재 인물을 대체해주는 기호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것을 들고 와 자신의 것이라고 거짓 주장할 가능성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바로 사진이다. 특정 시점 그리고 특정 장소에 존재했던 대상을 빛으로 기록한 사진은 실재 대상을 대체하는 기호다. 그런데 거기다 사진은 우리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과 매우 닮게 대상을 기록한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야 비로소 신분증 속 인물(X)과 내 눈앞에 존재하는 실재 인물(Y)의 ‘닮음(resemblance)’을 확인하고, 이 둘이 ‘동일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즉 사진적 닮음에 기반해 X와 Y가 동일하다는 ‘식별(identification)’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분증 사진의 작동 원리다. 실재 대상을 닮게 기록하는 사진의 능력을 우리가 신뢰하기 때문에 신분증은 기능을 발휘하는 셈이다.

우리는 사진이 들어간 플라스틱 카드, 때때로 이에 더해진 마그네틱 선이나 바코드 등을 강하게 믿는다. 이것들은 국가를 초월해 초국가적 시스템의 수준에서 개인 식별의 근거로 작동한다. 즉 우리의 삶 곳곳에 널리 퍼져 있다는 점에서 편재(遍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쉽게 믿도록 하는 사진의 힘 덕분에, 신분증은 개인을 올바르게 식별하게도 하지만 잘못된 거짓을 믿게 만들기도 한다. 루카스 버크의 작업이 보여주듯 닮음의 차원에서 높은 신뢰도를 갖는 사진은 손쉽게 가짜 정체성을 진짜로 믿도록 만든다.

일상 사진 속에 담긴 역학 관계에 관심을 두고 작업하는 루카스 버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미지를 독해할 때 항상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 묘사되었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보는 것 뒤에 숨겨진 일종의 정치적인 부분이다. 어떻게 이런 형태가 되었는가? 특정 사진이 고안되기까지 어떤 과정이 천천히 진행되었는가?”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공적 정체성과 그 정체성 뒤에 숨어 있는 권위적 요소는 우리 일상 곳곳에서 작동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적 정체성의 작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분증이다. ‘X=Y I·den·ti·ties’는 견고해 보이지만 실제로 취약한 신분증을 둘러싼 시스템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 시스템의 속성을 드러낸다.


▒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