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인스타그램 통해 작별인사를 보낸 미켈레. 사진 인스타그램
개인 인스타그램 통해 작별인사를 보낸 미켈레. 사진 인스타그램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가 구찌를 떠난다. 톰 포드가 떠난 후 회복 불능처럼 보였던 구찌를 극적으로 회생시키고, 오랫동안 정체됐던 패션 트렌드에 ‘맥시멀리즘(maximalism·화려하고 장식적인 과장된 형태의 경향)’과 ‘긱 시크(geek-chic·괴짜스러운 독특한 스타일)’란 활력을 불어넣었던 미켈레가 구찌에 이별을 고했다.

“각자가 가진 다른 관점 때문에 길이 갈라질 때가 있다. 오늘, 내 모든 사랑과 창조적 열정을 헌신했던 회사에서 20여 년간의 특별했던 여정이 끝난다. 이 긴 시간에 구찌는 나의 집, 입양된 가족이었다. 이 확장된 가족들에게, 돌보고 지지해준 각각의 개인들에게 감사하며, 진심 어린 포옹을 보낸다.” 온통 구찌로 도배됐던 미켈레의 개인 소셜미디어(SNS) 마지막 포스팅에 패션쇼 피날레 인사 사진과 함께 긴 인사 글이 올라 있었다.

마지막 인사의 첫 문장에 쓰여 있듯, 미켈레는 구찌의 모기업인 케링그룹 관리자들과 오랜 갈등이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었다. 미켈레가 구찌를 떠날 거라는 루머도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케링그룹은 별다른 입장이나 이유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최고경영자(CEO) 프랑수아 앙리피노는 “미켈레와 함께한 시간은 구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미켈레는 2002년 구찌에 입사한 후, 2015년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됐다. 1972년 로마 출생으로, 로마의 패션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펜디에서 시니어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있을 때 당시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톰 포드의 눈에 띈 것이다. 톰 포드의 추천으로 2002년 구찌 런던에 입사한 미켈레는 핸드백 디자인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톰 포드가 구찌를 떠난 뒤 구찌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프리다 지아니니의 오른팔로, 그녀 가까이에서 일하게 됐다. 그러나 프리다 지아니니의 구찌는 오래가지 못했다. 관능적인 하이엔드 스타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톰 포드의 그늘에 머물며 신선한 디자인을 창조하지 못한 채 구찌는 점차 정체됐고, 매출도 급격하게 하락했다. 결국 프리다 지아니니는 구찌를 떠나게 됐고, 그녀의 오른팔인 미켈레도 함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벌어졌다. 구찌의 새로운 CEO 마르코 비자리(Marco Bizzari)가 미켈레에게 만나자고 했다. 마르코 비자리는 스텔라 맥카트니의 CEO로 처음 케링그룹에 들어온 후, 2년 만에 스텔라 맥카트니를 흑자 브랜드로 전환시키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이후 보테가 베네타의 CEO가 되며 2조원 가까운 가치의 브랜드로 성장시켜 다시 경영 능력을 입증했다. 위기에 처한 구찌의 CEO가 된 비자리는 미켈레와 구찌 브랜드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고, 놀라운 제안을 했다. 겨우 일주일 남은 구찌 남성복 패션쇼를 준비할 수 있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미켈레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미켈레가 일주일 만에 준비한 2015년 구찌 가을·겨울 남성복 패션쇼는 톰 포드 이후 두 번째로 구찌 역사를 뒤바꿨다.

대부분의 명품 패션 하우스는 스타 디자이너들을 영입한다. 이는 전 세계 패션과 경제 관련 기사들을 도배시키고 관련 주가까지 띄우는 안정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남다른 패션 경영 안목을 지니고 있던 비자리는 톰 포드가 먼저 미켈레의 재능을 알아봤듯, 스타 디자이너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모두가 무모하다 했지만, 비자리의 도박은 잭폿을 터뜨렸다. 남성복 패션쇼에 이은 미켈레의 여성복 패션쇼에 세계 패션계가 열광했다. 오랜 침체기 끝에 구세주를 만난 듯 모두가 환호했고, 미켈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스타 디자이너로 높이 떠올랐다.


1 구찌 앰버서더 이정재(오른쪽)와 미켈레. 2 독특한 긱 시크(geek-chic)로 MZ 세대의 취향을 저격한 구찌. 3 미켈레의 마지막 컬렉션이 된 2023 봄·여름 트윈스버그 컬렉션. 사진 구찌
1 구찌 앰버서더 이정재(오른쪽)와 미켈레. 2 독특한 긱 시크(geek-chic)로 MZ 세대의 취향을 저격한 구찌. 3 미켈레의 마지막 컬렉션이 된 2023 봄·여름 트윈스버그 컬렉션. 사진 구찌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르네상스의 아름다움을 화려하고 복잡한 고전적인 상징들과 재조합하여 그만의 새로운 맥시멀리즘을 탄생시켰다. 그의 디자인은 장식적인 화려함과 함께 무규칙, 무시대, 무성을 추구한다. 또한 정교한 맥시멀리즘 의상에 기형적으로 큰 안경, 독특한 컬러와 프린트의 양말, 넥타이 등을 정신없이 매치시켜 신선한 긱 시크를 연출했다. 그렇게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을 기막히게 조화시키는 미켈레의 창의력은 명품 소비의 중심이 되어가는 MZ 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의 취향을 저격했다. 부모 세대에게서 물려받은 문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리믹스해서 즐기는 MZ 세대에게 구찌는 새로운 패션 파라다이스 같았다.

구찌 매출은 2015년 39억유로(약 5조4000억원)에서 2019년 96억유로(약 13조3000억원) 규모로 급성장했다. 구찌의 이런 경이로운 성공은 디자인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나이, 인종, 성별을 뛰어넘는 광고 캠페인과 기존의 명품 하우스들과 다른 협업을 펼치며 패션 문화 트렌드를 리드해 갔다. 구찌의 로고를 무단으로 사용한 스트리트 아티스트 트래버 앤드루와 협업하여 컬렉션을 발표하거나 같은 케링그룹에 속한 발렌시아가와 함께 해커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구찌의 상징인 GG 로고를 발렌시아가 백에 프린트하고 구찌 백에는 발렌시아 로고를 새겼다. 미켈레이기에 가능했던 상상 초월의 프로젝트들이다.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지난 7년간 새로운 구찌 유니버스를 창조했다. 20여 년 전 구식 명품으로 사장되어가던 구찌에 새 생명을 부여했던 톰 포드 이상으로 강렬하게 패션사에 기록될 7년이었다. 그러나 톰 포드가 그러했듯, 알렉산드로 미켈레 역시 영원한 구찌의 별이 되진 못했다.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2018년 최고의 매출을 기록한 이후, 정체를 맞았고 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이 엄격한 봉쇄 정책에 들어가며 큰 타격을 받았다. 모기업인 케링그룹은 미켈레가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접근법을 찾기 바랐지만, 미켈레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없는 구찌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지금은 안갯속이다. 톰 포드가 구찌를 떠난 뒤 10여 년간의 긴 정체기가 있었듯, 또다시 침체기에 빠질지 아니면 미켈레를 발굴한 비자리가 또 한 번의 반전을 일으킬지, 예측이 어렵다. 구찌가 어느 방향으로 가든 지금은 미켈레가 창조한 구찌 유니버스 7년을 찬찬히 감상해야 할 때인 듯하다. 미켈레의 영향력이 패션과 문화 전체에 얼마나 강력했고 한 시대 풍조를 주도해왔는지 깨달으며 커튼콜을 보내게 될 것이다.


▒ 김의향
패션&스타일칼럼니스트, 케이노트(K-note)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