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독일을 찾았다. 이곳의 겨울은 여전하다. 차곡차곡 붉은색 벽돌로 쌓아 올린 건물 위로 짙게 내려앉은 구름이 도시를 온통 회색빛으로 감싸고 있었다. 유럽의 중·남부와는 달리 대리석 채석이 어렵고 또 습기가 많은 날씨로 인해 건축 자재로 줄곧 즐겨 사용된 붉은색 벽돌의 건축물은 북독일 도시 풍경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조용한 겨울 날씨와 정갈한 벽돌의 건축물들이 어느새 필자에게 영감을 주었는지 바흐 ‘푸가’의 한 소절을 코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예전에 자주 찾아 연습했던 함부르크의 한 피아노 공방을 찾았다. 피아노를 보자마자 그 앞에 앉아 바로 전에까지 콧노래를 불렀던 바흐 푸가를 연주해 본다. 바흐가 한 번 고개 들어 봤을 법한 독일 겨울 하늘 아래 그의 조용한 곡을 연주하며 마음 안에 은은하게 퍼지는 기쁨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물론 음악이 같을 뿐, 3세기 전 바흐는 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하프시코드를 연주했을 테고 필자는 현대에 생산된 줄을 해머로 때려서 내는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하는 중이다.
바흐의 사후 약 300년 가까이 되는 동안 건반 악기는 엄청난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 하프시코드에서 포르테 피아노 그리고 현대 피아노까지(물론 이 변화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지경이겠지만). 현대 그랜드 피아노의 형태와 소리는 바흐가 살던 18세기에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이 거뜬히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하프시코드가 내는 작은 볼륨에 비해 전문 훈련을 받은 인력 서넛이 겨우 운반할 수 있는 육중한 현대 그랜드 피아노는 2000석의 초대형 콘서트홀에서도 모든 이에게 충분히 전달될 만한 위력적인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그랜드 피아노의 형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완성됐다고 볼 수 있다. 더욱 빠르고 정밀한 터치가 가능한 건반이중이탈장치, 강하게 타건해도 견고히 견뎌낼 수 있게 피아노 현을 강하게 조여 거치할 수 있는 철제 프레임, 거기에 더해 더욱 풍성하고 큰 볼륨을 낼 수 있도록 상부와 하부 현을 교차한 형태의 피아노가 이 시기에 완성됐고 규격화됐기 때문이다. 건반 악기 변천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피아노는 더욱 크고 빠르고 강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섬세하고 부드러운 소리의 표현 역시 가능하다. 하지만 바흐 시대의 하프시코드나 모차르트, 쇼팽 시대의 옛 피아노에서 느낄 수 있는 투명하면서도 부드럽고 또 전 음역이 고른 질감의 소리가 갖고 있는 미학적 아름다움을 현대 피아노로 표현하기에는 여간 어렵지 않다. 강력한 베이스 현의 소리와 경계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계속 커질 수 있는 현대 피아노의 거대한 볼륨은 바로크와 고전 그리고 낭만 초기 시대의 곡을 연주할 때 종종 부담스러울 정도로 어렵다.
이에 맞춰 유럽 피아노 제작에 몇몇 흥미로운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 1900년대 초 이후 별 다른 변화가 없었던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 제작에 새로운 시도가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으로는 2015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벨기에의 피아노 제작사 크리스 마네(Chris Maene)와 협업으로 새로운 콘셉트의 피아노를 선보인 것이다. 우리 시대 음악 대가로 존경받는 바렌보임의 새로운 행보에 전 세계 음악계에 큰 관심이 쏠렸었다. 바로 저음부 현과 고음부 현을 교차시키는 현대 방식이 아닌 19세기까지 스탠더드였던 현을 일렬로 배열하는 형식을 다시 적용한 것이었다. 물론 옛 피아노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닌, 독일 함부르크 스타인웨이에서 제공한 현대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의 외장을 차용하고 거기에 현을 19세기 방식으로 일렬로 배열하고 다시 현대 방식의 건반 장치를 설치한 것이다. 이를 통해 바렌보임과 제작사 크리스 마네는 교차현 방식이 주는 강력한 저음부 현과 과도하게 화려한 고음부 볼륨 대신, 19세기 피아노 소리의 특징인 모든 음역이 고르고 더욱 선명한 소리의 질감을 끌어내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현대 피아노 건반 액션을 통해 풍성한 소리의 볼륨을 구현하며 옛 피아노와 현대 피아노 각각의 장점을 결합하려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 마네뿐 아니라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피아노 제작자 스테판 파울렐로(Stephen Paulello)도 현을 병렬 배열 방식으로 제작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철제 프레임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면서 19세기와 현대 악기의 장점 결합을 꾀하며 그랜드 피아노를 생산하고 있다.
며칠 전 우연히 독일의 유명 피아노 테크니션 얀 키텔과 조우한 일이 있었다. 그와 나눈 대화가 꽤 인상적이었다. 그가 말하길 현재 유럽 공연장 관객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며 그에 따라 콘서트 규모도 현대 초대형 공연장이 아닌 옛 시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작은 규모의 연주 수요가 많아질 것으로 예측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그 변화를 더욱 가속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에 따라 옛 시대 피아노의 장점이었던 투명하고 섬세한 소리와 현대 피아노의 견고함과 안정성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피아노의 콘셉트 개발을 자신이 긴밀히 협업하는 독일의 한 피아노 공방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언급한 소식을 자주 접한다. 메타버스(metaverse· 현실과 가상이 혼합된 세계)란 단어 또한 이제 많은 이에게 낯설지 않다. 또한 팬데믹을 거쳐 조심스럽게 엔데믹(endemic·감염병 주기적 유행)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을 본다. 사회와 경제가 또 한번 구조적으로 변화하는 시기인 것일까. 거기에 맞춰서 예술과 음악은 어떻게 전개될 것이며 또 악기는 어떻게 변화할 것일까. 30년 뒤 필자는 어떤 피아노에서 오늘 연주한 바흐의 푸가 소절을 치게 될 것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 안종도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연주학 박사, 전 함부르크국립음대 기악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