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뉴진스. 사진 어도어
걸그룹 뉴진스. 사진 어도어

야구로 치자면 신인이 데뷔 첫 경기에서 삼 연타석 홈런을 날린 격이다. 뉴진스가 그렇다. 지난해 8월 1일 ‘Attention’이 담긴 미니 앨범으로 시작, ‘Ditto’와 ‘OMG’까지 모두 성공시켰다. 걸그룹 역사상 흥행과 관련된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현대적 걸그룹의 원형인 S.E.S.와 핑클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유례없는 일이다. 

‘Attention’ 뮤직비디오가 공개되던 날, 음악 관계자들이 모인 단톡방에서는 종일 이 신생 걸그룹의 매력이 화제가 됐다. 시장도 반응했다. 이날 이들의 소속사인 하이브의 주가는 전날 대비 6.47% 올랐다. 상승세는 한 달 넘게 이어졌다. 방탄소년단(BTS)의 활동 중단 이후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던 하이브로서는 새로운 킬러 콘텐츠를 시장에 안착시킨 셈이다. 2020년대 걸그룹 판도 또한 뉴진스·아이브·에스파 트로이카 시대가 열렸다고 할 만하다. 

한국 아이돌의 역사는 변증법의 역사였다. 1990년대 중반, 철저히 10대를 겨냥해 기획된 H.O.T.와 젝스키스 등의 그룹은 시장의 판도를 바꿨지만, 역으로 기성세대의 부정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립싱크로 대변되는 실력 부족, 철없는 애들의 문화 같은 것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그때마다 아이돌 생산자들은 아예 메인 보컬로 트레이닝시켰던 멤버들만 모아 그룹을 만들거나(동방신기), 가족이 공감할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거나(G.O.D.) 하는 식으로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선입견을 깨 왔다. 내수용이라는 인식은 보아로 타파했고 그래봤자 동양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은 마침내, BTS에 의해 과거가 됐다. 

뉴진스의 ‘엄마’ 같은 존재이자 어도어 대표인 민희진은 이 변증법적 발전의 주요 인물이다. SM엔터테인먼트(SM) 디자이너로 입사한 이래 소녀시대, 샤이니, 에프엑스, 엑소, 레드벨벳까지 그들의 비주얼과 콘셉트를 책임져왔다. 그리고 그것 모두 대성공을 거뒀다. 소녀시대가 ‘GEE’에서 선보였던 흰 티셔츠와 컬러 스키니진, ‘Romeo’ 시기 샤이니의 북유럽 고딕 룩, 에프엑스의 명반 ‘Pink Tape’ 발매 전후로 보여줬던 모든 것, 엑소의 학생증 포토카드 그리고 호러 무비와 20세기 중반 미국 팝 아트를 넘나드는 레드벨벳의 콘셉트까지. 그것은 단순히 아이돌 비주얼의 혁신이 아닌 K팝의 아이덴티티와 브랜드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작업이었다. 섹시, 청순, 착함, 터프같이 한정 돼있던 K팝의 수식어는 민희진에 의해 풍성해지고 전복되곤 했다. 아이돌 산업 바깥에 존재했던 크리에이터와 이미지들은 그녀의 디렉팅과 함께 K팝을 이루는 또 하나의 구성요소로 정착됐다. 고착된 트렌드에 반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또 하나의 트렌드를 만드는, 민희진의 변증법적 정반합이다. 그러니 2019년 빅히트엔터테인먼트(현 하이브)가 민희진을 브랜드총괄(CBO)로 영입했을 때,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연예인이 아닌 스태프의 이동이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어도어는 그런 민희진이 2021년 설립한 레이블이다. SM 시절부터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주축이다. 어도어의 수장으로서 첫 작품인 뉴진스는 민희진이 지금까지 그랬듯, 당연하게도 많은 기록을 갈아치우며 성공을 거뒀다. 그 흔한 데뷔전 티저 프로모션 없이, 공식 데뷔 첫날부터 화제의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2004년생(민지, 하니)부터 2008년생(혜인)까지, 10대로만 구성된 이 5인조 다국적 걸그룹은 그간 보지 못했던 매력을 뿜어냈다. 굳이 예쁜 척하지도, 과한 메이크업을 하지도 않는다. 데뷔곡 ‘Attention’의 뮤직비디오에서 뉴진스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복을 입고, 자연스러운 구릿빛 피부를 드러내며 웃고 춤추고 노래한다. 1980년대 일본, 혹은 1990년대 초반 미국 스타일의 희망적 분위기 안에서 다섯 명의 소녀는 ‘훈련된’ 퍼포먼스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매력을 발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돌의 데뷔곡에서는 본 적 없는 이미지다. 음악 또한 그렇다. 뉴진스의 메인 프로듀서는 ‘250’, 이태원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DJ이자 지난해 트로트와는 다른, 이른바 뽕을 진지하게 일렉트로닉 음악으로 해석한 ‘뽕’을 발표하며 주목받은 프로듀서다. 하이브와 SM의 노래들을 리믹스하거나 프로듀싱하기도 했지만 메인 프로듀서를 맡지는 않았다. 첫 메인 프로듀서 그룹인 뉴진스를 250은 채우기보다는 비운다. 과도한 이펙트를 걸지도 않고, 댐핑을 극한까지 끌어올리지도 않는다. UK 개러지 같은 비트를 기반으로 물 흐르듯 흘러간다. ‘맥시마이징(maximizing)’의 레퍼런스인 기존 K팝과는 다른 방향이다. 어도어와 뉴진스가 빠르게 대중문화계에 안착한 배경에는 이런 ‘차이’들이 있다. 

1월 2일 공개된 뉴진스의 새 싱글 ‘OMG’는 또 하나의 도전이다. 클 대로 커져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K팝 산업의 어두운 면을 직간접적으로 저격한다.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하는 이 비디오는 하니의 이런 대사로 시작한다. “저는 아이폰이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당신이 부르면 언제 어디라도 달려갈 거예요.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주고 당신을 위해 말하고 당신을 위해 노래할 거예요.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 머릿속은 항상 그 질문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아티스트의 자아와 욕망보다는 기획자와 대중의 욕망에 충실할 것만을 강요받는 아이돌을 아이폰에 비유해서 서술한다. 뮤직비디오 내내 이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멤버들 또한 자아 분열 상태를 암시하긴 마찬가지다. 그들은 끝내 뮤직비디오 속 캐릭터의 자신과 뮤직비디오를 촬영 중인 뉴진스로서의 자신을 분열시킨다. 나는 이 대목에서 씁쓸함을 느꼈다. 자연인으로서의 ‘나’와 대중이 원하는 ‘나’ 사이에서 힘들어했던 적잖은 연예·음악인들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K팝 산업이 발달할수록 팬덤의 양상도 다양해져 왔다. 물적, 심적으로 응원하는 좋은 의미의 팬덤도 커졌다. 악성 팬도 마찬가지다. 악플을 달거나 사생활을 쫓아다니는 정도를 넘어 허위를 사실처럼 확대 재생산한다.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프레임에 해당 아이돌을 가두려 한다. 자신들의 해석을 정답이라 착각하고 주홍글씨를 남발한다. 쌍방향 네트워크라는 말도 진부해진 지금, 악의와 적개심은 ‘일부’의 행위라 넘어가기엔 너무 커졌다. 특히 소셜미디어(SNS) 중에서도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가장 큰 휘발성과 전파력을 가진 트위터를 중심으로 어둠의 영향력은 증가해왔다. 

다시 ‘OMG’로 돌아가자. 뮤직비디오가 끝난 후 티저에선 악성 트윗을 작성하는 손이 나온다. 그에게 민지는 웃으면서 “너도 가자”라 말한다. 민지가 함께 가자고 말하는 세계는 어디일까. 뮤직비디오의 배경이 되는 정신병동일까. 아니면 부정적 에너지로 인생을 소모하지 않는, 밝은 팬덤의 세계일까. 규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장면을 통해 뉴진스 그리고 어도어와 민희진이 끄집어낸 화두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무서워서, 긁어 부스럼이 될까 봐, 혹은 악성 팬도 팬이라며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던진 메시지를 응원한다. ‘유사 연애’를 넘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자기 잣대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재단하는 편견)로 무장하고 있는, 뒤틀린 욕망을 존중하기엔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빠’와 ‘까’를 동시에 열광시킨, 보기 드문 사례를 뉴진스는 남겼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기획 및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