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감축하는 일은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이다. 전 세계는 탄소 감축을 위해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을 체결했고, 2015년에는 보다 강화된 의무를 부과하는 파리기후변화협약에 합의했다.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고 조 바이든 대통령 집권 후 재가입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기후변화 대응은 거스를 수 없는 전 세계적 추세가 됐다. 우리 기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도 기후변화 대응의 일환이다. 내연기관차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감축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기업에 세금 공제라는 혜택을 부여해 전기차 전환을 장려하고 있다.
기업 탄소 감축 유도하는 배출권 거래제
우리나라는 ‘배출권 거래 시장 호가 제출 시스템(K-ETS)’이라고 불리는 탄소 배출권 거래제를 도입해 기업의 탄소 감축을 유도하고 있다. K-ETS는 기업마다 탄소 배출량을 할당하고, 이 범위 안에서만 탄소를 배출할 수 있도록 한다. 기업은 정부가 정한 할당량 내에서만 탄소를 배출할 수 있도록 자체적으로 노력하고, 배출권이 남으면 이를 다른 기업에 팔 수 있다. 탄소 배출량이 많아 할당받은 배출권이 모자라는 기업은 경매를 통해 정부로부터 이를 추가 구매하거나, 배출권 거래 시장에서 다른 기업으로부터 구매할 수 있다.
K-ETS 도입 초기, 정부는 기업이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도록 배출권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예를 들어 정부는 A 기업에 연간 100t의 탄소 배출 할당량을 지정하고 동시에 배출권 100t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이 때문에 초기엔 기업이 부담하는 비용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3차 계획 기간인 현재, A 기업은 90t만을 무상으로 할당받고 나머지 10t은 자체적인 노력을 통해 감축하거나, 그러지 못할 경우 배출권을 사야 한다. 정부의 무상 할당 비율이 90%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는 무상 할당 비율을 점차 줄이더라도 교역량이나 비용 부담을 고려해 특정 조건을 충족한 기업에는 예외적으로 100% 무상 할당을 제공한다. 90t만을 무상 할당 받던 A 기업이 만약 특정한 조건을 충족한다면 나머지 10t도 무상으로 할당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기후변화 대응은 기업이 자발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윤 추구 집단인 기업 입장에선 자체적으로 비용을 들여 탄소 감축을 추진할 동기가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기업들의 탄소 감축을 유인해야 한다. 그런데 규제라는 채찍만으로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렵다. 정부 지원이라는 당근을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정부 보조금이다. 우리 정부가 K-ETS를 통해 탄소 배출량을 제한하는 채찍을 들었지만, 배출량을 일정 부분 무상으로 할당하는 당근을 동시에 주는 이유다.
"WTO 협정 위반"… 상계관세 때리는 美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정부가 재정적 기여를 통해 혜택을 제공하는 경우 이를 보조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보조금이 특정한 기업이나 산업에 제공된다면 보조금 협정의 규율 대상이 된다. 본래의 취지는 정부가 보조금을 통해 특정한 기업이나 산업의 경쟁력을 인위적으로 높여서 자유무역을 왜곡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대국 정부가 보조금을 통해 교역을 왜곡한다고 판단할 경우, WTO 회원국은 이를 분쟁 해결 절차에 제소하거나 자체적으로 상계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상계관세란 수입품에 포함된 보조금 액수만큼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 철강 업계는 K-ETS 제도하에서 100% 무상 할당을 받는 한국의 철강 기업들이 협정에 위반된 보조금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한국 정부가 다른 기업들에는 90%만 무상 할당하면서 철강 기업을 포함한 일부 기업들에는 10%를 추가로 무상 할당했으므로 이는 규정에서 벗어난 보조금이라는 것이다. 무상 할당된 10%는 경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부의 세입인데, 이를 포기했으므로 세금을 감면해 주는 것과 유사한 혜택을 제공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실제로 미 상무부는 무상으로 할당받은 탄소 배출권을 보조금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해 상계관세를 부과했다. 미국의 논리를 앞선 A 기업 사례에 적용해 보면, A 기업은 90t을 제외한 나머지 10t을 자체적인 노력으로 감축하거나 비용을 들여서 배출권을 구매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이를 한국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했으므로 이는 곧 보조금과 같다.
우리 기업과 유럽연합(EU)은 미국의 상계관세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인위적으로 탄소 배출량을 제한하고 이후 무상 할당하는 것이 보조금 협정상 보조금 정의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EU는 정당한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급된 ‘좋은(good)’ 보조금, 특히 환경 보호 및 탈탄소화를 위한 보조금은 자유무역을 왜곡하는 ‘나쁜(bad)’ 보조금과 구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쁜 보조금은 자국 수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미국과 EU는 대형 민간 항공기를 제작하는 보잉과 에어버스에 보조금을 지급했다고 WTO에 서로 제소했고, 분쟁은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환경 못 따라가는 낡은 협정…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배출권 무상 할당에 대한 미국의 상계관세 부과는 국제 통상 질서에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기후변화라는 전 인류적 도전에 대응하는 데 WTO 협정이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한 물음이다. 결론적으로 WTO 협정은 변화하는 기술 발전과 세계경제 환경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협정이 됐다.
WTO 협정이 현재의 세계경제 질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0년대 초 WTO 회원국들은 협정 내용을 개선하기 위해 도하개발아젠다(DDA)를 출범했으나 실패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이해관계가 달라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에도 회원국들은 WTO 각료 회의를 계기로 새로운 규범 마련을 위한 협상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따라 지금의 WTO는 1986년 우루과이라운드에서 협상된 낡은 협정으로 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WTO 협정은 ‘좋은’ 보조금과 ‘나쁜’ 보조금을 구분하지 않는다. 탄소 감축을 위해 지급된 친환경 보조금도 보조금 협정이 규정한 요건에서 벗어나면 협정 위반으로 간주돼 WTO 분쟁과 상계관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루과이라운드 시절 WTO의 전신인 관세 무역 일반협정(GATT) 체약국이 보조금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대응과 같이 전 인류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자국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산업 정책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좋은 보조금이 무엇이며, 회원국들이 어떻게 이를 규율할 것인지를 정하는 새로운 규범 협상이 필요하다. WTO 전체 회원국의 합의가 어렵다면, 같은 입장을 지닌 복수국 간에 친환경 보조금을 허용하는 합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수십 년 전 기준으로는 기후변화 규범과 국제 통상 규범이 충돌하는 현재 교역 질서를 규율하기는 힘들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