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제르바이잔은 불의 나라다. 지표면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불꽃은 비와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며 신비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아제르바이잔 사람의 삶과 문화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이 불의 근원은 땅속 깊은곳에 잠들어 있던 원유였다.
19세기, 아제르바이잔에서 세계 최초로 원유가 발견되며 이곳은 순식간에 석유산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20세기 초 세계 원유 생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아제르바이잔은 석유산업의 근원이자 기둥이 되었다. 석유로 상징되는 아제르바이잔이 오늘날 기후변화협약의 무대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가 11월 24일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막을 내렸다. COP(Conference of Parties)는 유엔기후변화협약에 관한 최고 의사 결정 기구로 매년 1회 개최되며,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방안(완화)과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적응)을 논의하는 자리다.
이번 COP29에는 전 세계 198개국에서 약 6만 명이 참석하며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글로벌 협력의 중요성을 재차 확인했다. 특히, 새로운 기후 재원 목표(NCQG), 국제탄소시장 운영 규정 확립, 온실가스 감축과 적응 문제에 대한 논의가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1│기후 재원 조성 목표(NCQG·New Collective Quantified Goal)
COP29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는 새로운 기후 재원 조성 목표(NCQG)의 설정이었다. 2035년까지 연간 1조3000억달러(약 1858조원) 규모의 기후 투자를 확대하고, 이 중 3000억달러(약 428조8000억원)는 선진국 주도로 조성하기로 했다. 이는 기존 목표였던 연간 1000억달러(약 142조9000억원)를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 한국은 이번 협상에서 개발도상국 지원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녹색기후기금(GCF)에 3억달러(약 4288억원)를 추가 공여하고, 손실·피해 기금에도 700만달러(약 100억원)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2│국제탄소시장(파리협정 제6조)
파리기후변화협약(이하 파리협정) 제6조에 기반한 국제탄소시장 세부 규칙이 9년 만에 최종 합의되며 배출권 거래를 위한 글로벌 표준이 마련됐다. 이번 합의는 국가 간 자발적 협력 사업(6.2조)과 지속 가능 발전 메커니즘(6.4조)의 운영 기준을 구체화하고, 국제 감축 실적(ITMOs) 관리와 투명성 강화 방안을 포함했다.
특히, 민간 부문의 참여를 활성화하는 지속 가능 발전 메커니즘(SDM)은 연간 1조 3000억달러에 달하는 기후 투자 목표와 연계되어 기업이 온실가스 감축 프로젝트에 참여할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이는 한국 기업에도 글로벌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3│감축(Mitigation)
COP29에서는 제1차 전 지구적 이행 점검(GST·Global Stocktake) 결과 발표 이후, 이를 기반으로 한 후속 조치 이행 절차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GST는 파리협정 목표 달성을 점검하고 각국의 기후변화 대응 진전을 평가하는 과정으로, 2023년 COP28에서 처음 시행되었으며 이후 5년 주기로 이루어진다.
GST 결과를 바탕으로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차기 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UAE 대화체에서는 재원 조성을 중점적으로 다루기를 원하는 개발도상국과 에너지 전환 및 차기 국가 결정 기여(NDC) 같은 감축 방안 논의를우선시한 선진국 간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에 따라 해당 논의는 내년으로 이관되었다. 또한, 감축 의욕과 이행 강화를 목표로 COP26에서 신설된 감축 작업 프로그램(Mitigation Work Programme)의 추가 지침에 대한 협상도 이루어졌다. 올해 감축 작업 프로그램의 논의 주제는 ‘도시: 건물 및 도시 시스템’으로, 이와 관련된 주요 논의 결과가 결정문에 반영되었다. 이를 통해 실질적인 감축 행동에 지침이 마련됐다.
4│적응(Adaptation)
적응과 손실·피해 문제는 COP29에서도 여전히 뜨거운 논의 주제였다. 적응 관련 논의에서 ‘바쿠 적응 로드맵’이 새롭게 설립되었다. 이 로드맵은 적응 역량을 강화하고, 기후변화로 인한 취약성을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지표와 전략을 제시했다. 특히, 글로벌 적응 목표(GGA)를 달성하기 위한 실질적 논의가 포함됐다.
반면,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COP29에서는 ‘바르샤바 국제 메커니즘(Warsaw International Mechanism)’과 ‘손실·피해 기금’의 운영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구체적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는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가장 크게 입고 있는 개발도상국에 여전히 도전 과제로 남아 있다.

5│투명성(Transparency)
COP29에서 열린 ‘글로벌 기후 투명성에 관한 장관급 원탁회의’에서는 격년투명성보고서(BTR·Biennial Transparency Report)의 제출 현황을 점검하고, 개발도상국 지원을 위한 ‘바쿠 기후 투명성 플랫폼(BTP·Ba-ku Global Climate Transparency Platform)’ 출범이 발표됐다.
현재까지 유럽연합(EU), 일본, 아제르바이잔을 포함한 13개국이 BTR 제출을 완료했으며, 다수 국가가 2024년 말까지 제출을 약속했다. 바쿠 기후 투명성 플랫폼은 개도국의 역량 강화, 기존 플랫폼과 협력, 다양한 이해관계자 참여 촉진을 통해 파리협정의 효과적 이행을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둘 예정이다.
COP29는 기후변화 대응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회의였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선으로 인해 협상 타결에 대한 우려가 컸던 상황에서도, 기후 재원 목표와 국제탄소시장 세부 규칙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을 큰 성과로 평가할 만하다. 특히 국제탄소시장 운영을 위한 기본 요건과 절차에 대한 합의는 기후변화 대응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국제 감축 사업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기업이 기후 재원과 연계된 감축 투자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COP29는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진행되던 탄소 중립 이행 논의가 원자력으로 확대된 중요한 흐름을 보여줬다. 안정적이고 탄소 배출이 없는 에너지원으로 재평가된 원자력은 소형 모듈 원자로(SMR) 등 차세대 기술 중심으로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보였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주최한 부대 행사 내용은 이러한 전환을 뒷받침한다.
바쿠의 불꽃이 과거 석유산업을 상징했다면, 이번 COP29는 그 불꽃을 희망의 불씨로 바꾸어 놓았다. 전 세계가 함께 기후변화를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이어가야 한다. 바쿠 COP 29에서 합의된 내용이 단순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