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월가와 국제금융계에서 ‘마러라고 합의(Mar-a-Lago Accord)’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과 맞물려 그의 경제 참모가 제시한 대외 경제 전략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재정·경상수지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달러 약세 유도 방안이 포함돼 있다.
달러 약세 유도하는 미국…왜?·어떻게?
스티븐 미란(Stephen Miran) 백악관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4월 7일(이하 현지시각)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해 달러를 기축통화로 유지하는 과정에 미국 정부가 막대한 재정·무역 적자를 떠안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국제적 차원의 비용 분담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그가 2024년 11월 발표한 보고서 ‘세계 무역 시스템 재편을 위한 사용자 안내서(A user’s guide to restructuring the global trading system)’에서 처음 제시된 내용이다. 이 보고서에서 미란은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국제금융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감내한 경상수지 적자가 과도한 달러 강세를 일으켰고, 이로 인한 제조업 붕괴로 미국 중산층을 붕괴시켰다고 주장했다. 기축통화국이 경상수지 흑자를 추구하면 세계경제가 침체하는 ‘트리핀 딜레마’가 미국 경제를 약하게 했다는 것이다.
미란은 ‘글로벌 공공재’인 달러를 사용하는 교역국이 비용을 분담하는 형태의 다자간 통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85년 9월 미국 주도로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이 달러 약세 유도에 동의한 ‘플라자 합의’ 형태의 통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국이 달러를 매각하고 자국 통화를 매수해 유통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시장에 개입하기로 한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와 마르크화 가치는 2년 동안 약 50% 이상 절상됐고, 달러 가치는 하락했다. 미란은 자신이 제안한 다자간 협의를 마러라고 합의라고 불렀는데, 마러라고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소유한 리조트를 말한다.
미란이 구상한 마러라고 합의 방식은 기축통화인 달러 자산으로 준비자산(외환보유액)을 쌓는 교역국이 10년 이하 단기 미국 국채를 팔고 100년 만기 초장기 국채를 매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는 여기에 더해 이 초장기 국채 이자율도 무이자에 가까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고금리 시절 발행한 국채의 이자 부담을 줄여 미국의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한 것이다. 장기물 수요를 늘려 금리 상승 압력을 완화하고 미국 달러 강세를 억제하는 것도 주된 목표 중 하나다. 미란은 이를 통해 무역수지 균형이 회복되면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작아지면서 재정 건전성이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그는 동맹국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해 관세와 안보를 외교적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2018~2019년 중국과 무역 전쟁 당시 도입했던 고율 관세가 인플레이션 유발 없이 세수를 증가시켰다고 주장하며, 국가별 관세의 최적 수준을 20%로 제시했다.
“가능성 작은 합의…실현 시 韓 경제 타격”
트럼프 집권 초기에는 미란의 구상이 실현 가능성이 작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위적인 달러 절하는 글로벌 자금의 급격한 이동을 유발해 경제 전반에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가 실제로 고율 관세와 안보를 내세운 강경한 통상 압박을 추진하면서, 마러라고 합의 역시 단순한 이론을 넘어 트럼프식(式) 세계경제 전략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만약 이 합의가 현실화한다면 한국 경제에는 복합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원화 강세에 따른 수입 물가 하락, 물가 안정, 금융시장 안정 효과가 기대된다. 중간재 수입 후 완제품을 수출하는 국내 제조업 특성상, 원화 강세는 생산비 절감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득(得)보다 실(失)이 더 클 것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마러라고 합의가 관세정책과 병행 추진되는 과정에 한국 기업은 미국으로 생산 시설을 이전하도록 압박을 받을 수 있다. 이는 국내 일자리 감소와 수출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외환보유액의 구조가 미국 장기채 중심으로 재편돼 환율 급변 등 위기 상황에서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줄어들 수 있다. 이는 외환시장 안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전망이다.
전문가 사이에서는 이 합의의 현실화 가능성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박수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플라자 합의 당시에는 일본과 독일 등 주요 국가가 강한 경제 체력을 바탕으로 협상에 임했지만, 현재는 미국 외에 경제 상황이 안정적인 국가가 많지 않다”면서 “마러라고 합의가 성사될 가능성은 작다” 고 분석했다.
반면, 세부적인 내용을 조정하면 현실화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김찬희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동맹국이 미국의 관세 부담과 마러라고 합의 참여로 인한 비용을 비교해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며 “각국과 협상을 거쳐 어느 정도 수정된 형태로라도 추진될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 불확실성 그리고 차곡차곡 추진되는 트럼프 2기 정부의 재정 수지 개선 관련 정책 추진 의지 등을 고려할 때 마러라고 합의를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로 치부하기 어렵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100년 무이자 국채 발행을 또 다른 협상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통화 절상 압박 혹은 미국 국채 매입을 강력하게 유도하는 전략을 추진할 수 있음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key word
트리핀 딜레마(Triffin dilemma) 글로벌 기축통화가 국제경제에 원활히 쓰이려면 기축통화 발행국의 적자가 늘어나야 하고, 반대로 기축통화 발행국이 무역 흑자를 보면 기축통화가 덜 풀려 국제경제가 원활해지지 못하는 역설. 1960년대 벨기에계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이 지적. 글로벌 기축통화 역할을 하는 국가의 단기 국내 목표와 장기 국제 목표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을 의미.
中, 美 국채 던졌다고? 2013년 정점 찍은 후 매도 지속
트럼프 대통령이 4월 2일 발표한 상호 관세 발효를 4월 9일 전격적으로 90일 유예한 배경은 미 국채 금리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에 보복관세로 맞대응하고 있는 중국이 보유 중인 미 국채를 대량 매도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그러나 2010년대 초반 이후 중국은 미 국채 보유액을 꾸준히 줄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중국의 미 국채 보유액은 7590억달러로, 전년보다 570억달러 줄었다. 이는 2013년 11월 정점(1조3160억달러) 이후 꾸준히 감소해 2009년 말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외환 보유 자산을 금, 유로화, 위안화 표시 자산 등으로 다변화하며 달러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줄이고 있다고 분석한다. 미국외교협회(CFR)의 브래드 세서 연구원은 “중국은 지정학적 경쟁국인 미국에 자산을 집중시키는 데 부담을 느껴, 2010년대 초부터 위험 분산을 추진해 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중국은 미 국채 대신 미 정부 기관채 매입을 늘리거나, 보유 자산 일부를 금 등 실물 자산으로 전환하고 있다. 국채 가격 하락에 따른 평가액 감소도 보유액 축소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지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