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한국에서 개봉한 것은 2002년이다. 당시 우리 부부는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이었던 아들과 딸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영화를 함께 본 기억이 난다. 나는 어딘가에 기고할 이 영화 리뷰 작성을 놓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동화 혹은 민담 성격을 띤 이 영화의 주제, 심리학적 의미와 상징을 파악하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아들과 딸은 순수한 어린이 감성 그대로 판타지 성격의 이 영화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부모님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영화에 몰입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하, 우리 아이들은 자신들 상상 속의 친구들이 영화에 나올 때, 그들을 어린이 본연의 동심(童心)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는구나.’ 또 ‘부모님의 마음속에도 아이들과 유사하게 자연스레 상상력을 동원해서 판타지 자체에 몰입하게 만드는 또 다른 동심의 원천인 ‘내적인 아이(inner child)’가 살아 있구나.’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내가 한글 자막도 없는 도쿄의 한 영화관에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형언하기 힘든 영상미학의 극치에 매료돼 황홀경에 빠져버렸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토리 자체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미야자키 감독이 연출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개봉한 2004년. 한국 북디자인의 선구자인 정병규 선생이 사석에서 관람 소감을 전했다. 그의 마음에도 내적인 아이가 살아 있었다는 뜻으로 나는 읽었다.
유독 나만 일에 쫓겨 영화를 있는 그대로의 평심한 마음으로, 내 마음속 내적인 아이의 프리즘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먹물에 찌든 지식인의 어쭙잖은 인문학적 지식과 합리성의 잣대로만 영화 인물과 사건 등을 쪼개고 나누며,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던 셈이다.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는 아날로그 감성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이 주목받고 있다.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고급 오디오 기기가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도 손끝으로 올리는 LP판이 여전히 인기가 있다. 카세트테이프와 워크맨이 다시 등장한 것도 마찬가지다. 디지털카메라는 엄청난 화소 수에 무제한으로 셔터를 눌러서 그중에 맘에 드는 작품을 즉석에서 골라도 된다. 이런 편리한 디지털카메라를 두고, 어떻게 찍혔는지 인화하기 전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느린 템포의 필름 카메라가 여전히 팔린다.
편리하기 그지없는 각종 디지털 노트 앱이 많다. 현장에서 필기를 하자마자 동시에 녹음이 되고, 그 내용을 텍스트로 바꿔준다. 게다가 내용의 핵심을 콕 집어 요약해 주고, 심지어 마인드맵으로 작성해 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펜촉의 미세한 눌림의 촉감까지 살아 있는 수제 노트와 일일이 잉크를 넣어주거나 갈아 끼워야 하는 만년필을 사람들은 여전히 찾는다. 첨단 설비를 갖춘 모던한 카페의 시대이지만, 소박하고 촌스럽기까지 한 옛날 다방식 인테리어를 한 커피숍이나 카페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복고적 취향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하나의 트렌드로 굳은 지 오래다. 왜 그럴까.
이런 트렌드 이면에는 우리 마음속의 어딘가에 어떤 본질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흐름 속에서 보면 지브리풍의 인기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우리 내면 깊은 곳을 건드리는 ‘심리적 숲(inner forest)’ 혹은 ‘치유의 샘(healing spring)’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무의식의 깊은 세계에 빠져들면서 우리 내면의 어떤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주인공 치히로는 어른들이 잃어버린 순수성과 정체성을 회복해 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잊어버린 이름을 다시 찾는 과정은 곧, 잃어버린 ‘자아(ego)’를 다시 찾아가는 심리적 치유를 상징한다. 그녀가 빠져든 모험의 여정은 기이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에서 만난 듯한 기시감과 함께 정겨움까지 느껴진다.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환상 속 공간이 현실보다 더 진실하게 다가온다. 우리 의식과 무의식이 대면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인공 소피는 노년의 모습으로 갑자기 변하지만, 그 속에서 오히려 내면의 용기와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소피의 외적인 변화는 그녀 내면의 성숙을 반영한다. 소피와 하울의 관계는 서로의 상처와 불완전함을 마주하고 치유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이는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shadow)가 우리 내면의 자기(self)와 통합하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림자는 즉 우리가 알게 모르게 억압하여 무의식의 은밀한 창고 속에 처박아 두었던, 혹은 처박아 두고 싶었던 마음속의 상처, 부끄러움 등을 말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지브리풍의 애니메이션 작품은 우리 무의식을 자극한다. 그것은 단순한 애니메이션 이상이다. 손으로 그린 듯한 따뜻한 색감, 자연의 숨결이 담긴 배경, 일상에 숨겨진 마법적 요소는 과도한 강도의 자극, 과다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상큼한 휴식과 위안을 선물한다.
잃어버린 시간에 닿고 싶어 하는 심리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지브리풍은 감각 과부하(sensory overload)에 대한 해독제이며, 마음 챙김(mindfulness)을 유도하는 정서적 자극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계에서 천천히 머무르는 법을 알려준다. 지브리풍은 잊고 있던 감각과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감정을 다시 깨워준다. 자연과 사람, 관계와 기억이 조용히 어우러진 장면은 상실된 애착(at-tachment)을 회복하고, 정서적 연결감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감성은 융의 집단 무의식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지브리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숲, 바람, 물, 고요한 공간은 인류 보편의 원형적인 심상(archetype)으로 작용하며, 개인 내면을 안정시키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이라는 차갑고 냉철한 질서 속에서, 우리는 다시 따뜻한 감각과 인간적인 감성의 원초적 터전으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지브리풍 프로필 사진(이하 프사)이나 일러스트가 소셜미디어(SNS)에서 인기를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SNS에 지브리풍 프사를 올리는 사람 중에는 자기 실제 사진을 공개하는 데 부담을 느껴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경우도 있다. 또한 지브리풍이 주는 따뜻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더해 닮은 듯하면서도 실물보더 더 예쁘게 나오는 효과를 노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브리풍에 심취하는 마음의 심층에는 이런 행위를 통해 무의식중에 ‘잃어버린 시간’에 닿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는 것 같다. 빠르게 지나가는 과도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마음이 숨 쉴 틈을 찾는 본능적인 행위라는 말이다. 지브리풍 프사가 크게 유행하자, 미야자키 감독이 설립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는 지식재산권 문제로 무척 예민한 모양이다. 하지만 개인이 지브리풍 프사를 올리는 문제에 그렇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을까. 물론 이를 단순히 자신의 SNS에 재미로 올리는 차원을 넘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다른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디지털 피로에 지친 현대인은 앞으로도 아날로그 감성을 끊임없이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 지브리풍이라는 보장은 없다. 대중은 언제라도 제2·제3의 지브리풍을 찾아 나설지 모른다. 스튜디오 지브리 측에서도 이런 사정을 감안해서 너그러이 봐 달라는 말이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지브리는 원래 ‘북아프리카 사하라사막에서 부는 뜨겁고 건조한 열풍’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기블리(ghibli)’에서 나왔다고 한다. 지브리풍이 단순한 소비 열풍을 넘어, 현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정서적 언어이자, 디지털 시대에 얼어붙은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열풍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