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는 피노 누아(Pinot Noir)로 만든 레드 와인과 샤르도네(Chardonnay)로 만든 화이트 와인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한다. 산지가 남북으로 230㎞나 뻗어 있는 이곳은 기후와 토질이 다양해 같은 품종으로도 다채로운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대를 이어 경영하는 가족 와이너리가 많은 것도 큰 장점이다. 부르고뉴 와인 생산자는 어릴 적부터 포도밭에서 뛰어놀고 일손을 도우며 자연스레 토양과 포도를 익힌다. 포도밭이 집 앞마당이나 매한가지니 땅을 아끼는 마음이 남다르고 직접 기른 포도로 만든 와인은 낳아 기른 자식이나 진배없다. 그래서 부르고뉴 와인이 위험하다. 와인에서 생산자의 정성을 느끼는 순간 부르고뉴의 ‘찐팬’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싼 가격이 늘 걸림돌이다. 오죽하면 ‘강남 집값과 부르고뉴 와인은 지금이 가장 싸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겠는가.
최근 프랑수아 라베(François Labet) 부르고뉴 와인 협회(BIVB) 협회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그랑 크뤼(Grand Cru·부르고뉴의 최고 등급) 와인에 대한 투기가 극성을 부려 일부 와인의 가격 상승이 도드라진 탓이지 모든 와인이 비싼 것은 아니다. 부르고뉴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품질도 우수하고 가격도 합리적인 와인이 얼마든지 있다”라고 역설했다. 과연 그럴까? 그가 추천한 와인을 함께 맛보며 꼼꼼히 적어둔 기록을 공유한다.
샤르도네 팬이라면 부르고뉴 북단과 남단 주목
부르고뉴 최북단에 있는 샤블리(Chablis)는 오로지 샤르도네만 생산한다. 과거에 바다 밑이었던 이곳 땅에는 석회질이 많아 와인에서 조개껍데기나 부싯돌 같은 미네랄 향이 난다. 그래서 샤블리는 해산물과 즐기기 좋은 와인으로도 유명하다. 기후가 서늘하다 보니 그랑 크뤼 와인은 일조량이 풍부한 곳에서만 소량 생산되고 가격도 비싸지만 바로 아래 등급인 프르미에 크뤼(Premier Cru)나 마을 등급인 샤블리 AOC 중에는 탁월한 가성비를 자랑하는 것이 많다.

프르미에 크뤼 와인 중에 도멘 당리(Do-maine d’Henri)의 볼로랑(Vaulorent)은 싱그러운 과일 향이 가득하고 여운에서 산뜻한 감귤 향이 이어진다. 라 매뉴팩처(La Manu-facture)의 포레(Forêts)는 향긋한 프리지아와 은은한 꿀 향이 매력적이었다. 샤블리 AOC 와인으로는 도멘 세귀노 보르데(Se-guinot-Bordet)가 야생화, 부싯돌, 흰 후추 등의 아로마로 세련미를 뽐냈고, 도멘 루이 모로(Louis-Moreau)는 풍성한 과일 향, 탄탄한 질감, 상큼한 산미의 조화가 훌륭했다. 라베 협회장과 함께 방한한 장 프랑수아 보르데(Jean-François Bordet) 샤블리 와인 위원장은 “이 정도 품질이면 굳이 그랑 크뤼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샤블리 특유의 미네랄 향과 상큼함은 프르미에 크뤼와 샤블리 AOC에서 더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라고 강조했다.
똑같은 샤르도네로 만들어도 부르고뉴 남쪽에서 생산된 와인은 풍미가 다르다. 기후가 온화하기 때문에 과일 향이 더 달콤하고 묵직한 보디감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라베 협회장은 남쪽 산지 중에서도 몽타니(Mon-tagny)와 생 배랑(Saint-Véran)을 주목할 만한 마을로 꼽았다. 이곳 와인은 아로마가 풍부하고 숙성 잠재력이 뛰어나지만, 가격은 유명 와인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그와 함께 시음한 매종 올리비에 르플레브(Maison Ol-ivier Leflaive)의 몽타니 프르미에 크뤼 본느보(Bonneveaux)는 매끈한 질감과 경쾌한 산미의 어울림이 뛰어나고 여운에서 신선한 과일 향이 길게 이어졌으며, 비녜롱 데 테레 스크레트(Vignerons des Terres Secrètes)의 생 베랑 레 프렐뤼드(Les Preludes)는 복숭아와 살구 같은 핵과류의 감미로운 풍미와 아카시아의 화사한 향이 매력적이었다.

이랑시, 마르사네, 본은 떠오르는 피노 누아 산지
부르고뉴 피노 누아는 와인 애호가가 가장 소장하고 싶은 와인으로 꼽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랑 크뤼는 값이 너무 비싸 논외로 치더라도 프르미에 크뤼나 마을 등급도 자주 마시기엔 가격이 만만치 않다. 와인숍에 가도 셀러 안에 고이 모셔둔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바라보며 침만 삼키기 일쑤다. 라베 협회장은 유명한 마을보다 이랑시(Iran-cy), 마르사네(Marsannay), 본(Beaune)으로 눈을 돌릴 것을 추천했다. 이랑시는 부르고뉴 안에서 피노 누아 산지로는 최북단에 있다. 기후가 서늘해 과거에는 이곳 와인에서 신맛이 강했지만 지구 온난화를 겪는 요즘은 제법 잘 익은 과일 향을 뽐낸다. 도멘 베레 =(Domaine Verret)의 이랑시 퓌 드 쉔느(Fût de Chêne)를 맛보니 과연 산딸기, 체리, 라즈베리 등 달콤한 베리 향이 풍성하게 입안을 채웠다.
마르사네도 이름난 곳은 아니지만 와인 애호가 사이에서는 가격 대비 품질이 좋기로 정평이 난 곳이다. 도멘 뒤 비유 콜레주(Do-maine du Vieux Collège)의 마르사네 클로 뒤 루아(Clos du Roy)는 체리와 블랙베리 등 아로마의 집중도가 남다르고 질감이 탄탄했다. 본의 피노 누아는 풍부한 과일 향과 풍만한 보디감이 특징이다. 도멘 피에르 라베(Pierre Labet)의 본 프르미에 크뤼 쿠셰리아(Coucherias)는 딸기, 자두, 라즈베리 등 싱그러운 과일 향과 부드러운 질감이 우아한 피노 누아의 모범 답안 같았다. 라베 협회장과 시음한 와인은 모두 국내에 수입 중이다. 그동안 비싼 가격 때문에 망설였다면 이제 그가 추천한 와인을 찾아보자. 모처럼 부담 없이 부르고뉴 와인으로 향긋하게 목을 축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