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 있는 한 LP 음반 전문점 내부. / 사진 블룸버그
영국 런던에 있는 한 LP 음반 전문점 내부. / 사진 블룸버그

매년 4월 12일은 레코드 스토어 데이다. 우리말로 풀면 ‘음반점의 날’. 아니, 아직도 음반점에 가는 사람이 있냐고? 저요! 음악을 업으로 삼은 필자 같은 사람 말고도 있다. 아니, 많다.

평일 오후 1시나 2시, 서울 마포구의 김밥레코즈나 도프레코드 같은 음반 소매점에 가면 10·20대 젊은이가 오픈 시간에 맞춰 들이닥쳐 진지한 얼굴로 오아시스부터 빌리 아일리시까지 다양한 아티스트의 LP(바이닐)나 CD를 뒤적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1985년이나 1995년이 아닌 2025년, 바로 지금 말이다. 음악이 네모나거나 둥근 ‘레코드판’에 들어있던 시절은 물론 애초에 지났다. 뉴밀레니엄과 디지털 음악의 파고는 높았으므로. 음악이 무형의 것, 언제 어디서나 버튼 하나만 누르면 세상 모든 음악이 수돗물처럼 졸졸거리며 나오는 스트리밍(streaming· stream은 개울 또는 졸졸 흐르다)의 멋진 신세계가 열린 지도 20년 가까이 됐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은 음악을 손으로 만지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아예 무형 음악의 시대만 살아본 젊은이들은 ‘더더욱 경험해 본 적 없는 향수’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레코드 스토어 데이는 200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시작된 이래 17년째 성업 중이다. 원래 취지는 디지털 시대에 여전히 판을 팔며 고군분투하는 동네 음반점을 살려보자는 것이었는데, 판의 판이 커졌다. 매년 스타들도 이 행사에 참여한다. 인디부터 메이저까지 다양한 음악가가 레코드 스토어 데이 기념 ‘한정판’을 내놓는데 이를테면 올해는 미국의 슈퍼스타 래퍼 겸 싱어송라이터 포스트 멀론이 1990년대 록 아이콘인 밴드 너바나에 헌정하는 앨범을 4월 12일(현지시각)에 맞춰 내놓았다. ‘Come As You Are’ ‘About a Girl’ 같은 너바나의 명곡을 멀론의 걸쭉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니 음악 팬은 설렌다.

오프라인 이벤트 성패 주요 변수 된 '포모증후군'

오늘은 이렇게 한정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꼭 레코드 스토어 데이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최근 영국 음악계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바로 심각한 록 음악 대 트렌디한 힙합 음악의 한판 승부였다. 도전자는 ‘포큐파인 트리’라고 하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의 리더인 스티븐 윌슨(1967년생)이다.

프로그레시브 록 장르가 무엇인가. 저 1970년대 핑크 플로이드, 킹 크림슨, 예스 등이 구사했던 가히 서사시와 록을 접목한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장르다. 이쪽 장르의 팬에게 음악은 즐기는 대상이라기보다 거의 석사 학위 논문 주제에 더 가깝다. 기나긴 악곡과 철학적인 가사를 파고들고 연구한다. 아무튼 아직도 그 장르는 살아 있다. 

1992년 데뷔한 포큐파인 트리를 이끄는 윌슨은 21세기 프로그레시브 록의 선봉장이다. 그가 지난달 내놓은 신작 앨범이자 솔로 8집 ‘The Overview’는 23분 17초짜리와 18분 27초짜리 단 두 곡으로 이뤄진 대담한 음반, 쇼트폼의 시대를 역행하는 반란의 앨범이다. 우주비행사가 처음 우주 공간에 나가 지구를 내려다보며 느끼는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 ‘오버뷰 효과’에 착안한 철학적 콘셉트의 음반이다.

임희윤 문화평론가 - 현 한국대중 음악상 선정위원,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공저)’ 저자
임희윤 문화평론가 - 현 한국대중 음악상 선정위원,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공저)’ 저자

이 음반은 발매 첫 주에 마니아의 구매가몰리면서 그 주 중반까지 UK 앨범 차트 1위가 유력했다. 하지만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다. 윌슨의 아들뻘 되는 미국 인기 래퍼 플레이보이 카티(1996년생)의 새 앨범. 카티의 신작은 44분짜리에 단 두 곡을 담은 윌슨의 음반과 대척점에 있었다. 불과 1분대, 2분대의 짧은 곡이 30개 포진한 앨범이었던 것이다. 홈 스튜디오에서 대부분의 악기와 노래 녹음을 거의 스스로 해낸 윌슨과 달리 카티는 무려 50명이 넘는 작곡가, 프로듀서를 참여시켰다. 가사도 인간과 우주, 삶과 죽음을 오버뷰 효과로 고찰한 윌슨과 달리 힙합에 즐겨 쓰이는 남녀상열지사와 자기 자랑이 주다. 더욱이 래퍼 카티의 앨범 제목이 걸작이다. ‘I AM MUSIC’. 즉, ‘내가 음악이다’다. 진지한 프로그레시브 록과 윌슨을 지지하는 연구자 느낌의 팬에게는 지극히 2025년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래퍼의 음반이 ‘(요즘 시대엔) 내가 음악이지!’ 하는 외침이 어떻게 들릴까. 하여튼 재미난 대결이었다. 결과는 카티의 역전. UK 앨범 차트 1위를 카티가 차지했고 윌슨은 3위에 랭크되며 선전했다.

희대의 맞대결에서 디지털 스트리밍과 쇼트폼에 최적화된 카티의 음반에 윌슨의 서사시가 상업적으로 대적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바로 한정판의 힘이다. 윌슨은 ‘The Overview’를 CD, 코멘터리(해설) CD, LP, 블루레이 등 다양한 버전으로 공개했다. 팬은 지갑을 열었다. 사실 요즘 시대에는 코멘터리 CD, LP, 블루레이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요즘 세상에선 일반적인 CD, 그 자체부터가 한정판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는 CD가 아닌 디지털 음원이 소비되는 시대이다 보니 CD나 LP 같은 실물 음반은 음악가의 인지도를 막론하고 초도 판매량만 조금 찍고 절판시켜 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팬 입장에선 ‘새 CD가 나왔다!’고 할 때 얼른 구입하지 않으면 ‘최애 아티스트’의 음악을 영영 무형의 디지털로 소비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다. 요즘 공연 시장이나 각종 오프라인 이벤트의 성패도 결정하는이른바 포모증후군(FOMO syndrome·유행에 뒤처져 소외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다. 한정된 뭔가를, 정확히는 한정된 실물의 뭔가를 구해서 자신의 피드나 스토리에 올리지 못하면 역으로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된 내 팔로어들의 ‘자랑 공격’에 가뜩이나 우울감을 조성하는 소셜미디어(SNS)가 우울의 융단 폭격으로 며칠간 가할 거라는 그런 ‘놓침의 두려움’ 효과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인 ‘리서치 앤드 마켓’에 따르면, LP 레코드 시장은 현재 한정판 마케팅이 견인하고 있으며, 전체 시장 규모는 미국 기준으로 2023년 약 15억달러(2조1862억원)에서 2030년 24억달러(3조5000억원)로, 연평균 7.1% 성장할 전망이다. 1970년대 전성기를 보낸 핑크 플로이드부터 2025년 현재 뜨거운 빌리 아일리시까지, 팝 마켓에 나와 있는 모든 아티스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한정판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검은 원반이 기본인 LP를 발매하되 이 중 일부는 분홍색이나 무지개색 등의 이른바 컬러 LP로 찍어낸다거나 CD나 LP로 재생해야만 들을 수 있는 미공개 보너스 트랙을 집어넣거나, 특별한 화보집을 동봉하는 식의 다양한 방법이 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많은 것이 사이버가, 버추얼이 된다. 손에 만져지던 적잖은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유형의 생명체다. 촉각과 물리적 소유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정판의 미학과 경제학은 먼 미래까지도 지속되리라 믿는다. 

임희윤 문화평론가